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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닉뮤직을 또 다시 변화시키고 있는 Richie Hawtin
언제나 탐구심과 대담함, 댄스플로어에 대한 열정으로 넘치는 Richie Hawtin
Joe Muggs | 2019-07-18
Richie Hawtin이 정글리스트라면 어땠을까? 평행우주가 있다면, 상황이 뭔가 다르게 흘러갔다면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다. 우선, 그의 부모님은 영국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전에 원래는 뉴질랜드에 가서 살고 싶어 했다. 둘째, 그가 Metalheadz에서 주기적으로 파티를 하고 Mo’ Wax의 리믹스를 만들던 90년대 후반, 그는 당시 유행의 흐름을 타던 테크노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런던에 가서 완전히 다른 씬에 마음을 빼앗길 여지가 충분했다.

물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그는 캐나다에서 자랐고 디트로이트와 연고가 있는 테크노의 대가다. 그는 테크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90년대에 매섭고 실험적인 일렉트로닉뮤직을 세계적으로 띄웠고, 2000년대에는 베를린과 이비자에서의 파티들을 통해 무브먼트를 이끌었으며, 2010년대 들어서는 테크노를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는 EDM과 트랜스의 대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테크노에서 그와 견줄 사람은 Carl Cox 뿐일 지도. 그는 디지털 디제잉의 초기 실험에서부터 아레나의 비주얼, 그리고 그의 새로운 쌍방향 시청각 라이브 앨범 `CLOSE Combined`에 이르기까지 매번 새로운 공연 방법을 개척해왔다. 어플을 통해 사용자가 Hawtin이가 무엇을 하는지 자세히 볼 수 있는 `CLOSE Combined`는 최초의 진정한 스마트폰앨범이라고 할 수 있다. 채널과 악기를 분리해 그의 셋을 실시간으로 분해해볼 수도 있다.





그가 10대의 나이로 이 씬에 뛰어든 지 30년이 지났지만 기본에 대한 그의 이해도는 시들지 않았다. Mixmag의 파리 BUDX를 위해 마련된 클럽 공간은 그의 나이에 절반도 못 미치는 관중들로 꽉 차 있고, 어떤 첨단 기술을 과시하는 쇼도 없지만 부스에 선 Hawtin의 모습은 마치 자기 집인 양 편안해 보인다. Kevin Saunderson이 마지막 셋을 펼치자 Hawtin이 고마움이 담긴 미소와 함께 사케와 시계를 들고 올라간다. 두 사람이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누는데 미국 풋볼선수 출신인 Kevin 옆에 있으니 가뜩이나 호리호리한 Hawtin이 마치 요정 같다. 그리고 Hawtin이 마침내 자신의 디지털 DJ 컨트롤러에 착수한다. 딱히 그의 평소 스타일은 아니다. 그 어떤 바이닐 스타일 믹싱이나 피치 컨트롤도 없이, 이미 싱크되어 있는 트랙들과 DJ 툴들을 본인이 직접 설계한 Model 1 믹서의 6채널에 짜맞추어 넣는데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커팅과 페이딩, EQ작업, 리버스 작업, 루프 레이어 작업을 일반적이지 않은 툴로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디제잉이 올드패션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유기적이고, 정통이며, 관중과 DJ가 서로 상호작용하고 있다. 또한 비록 온갖 기술을 활용하지만 Richie의 퍼포먼스의 본질은 결국 댄스플로어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다음날, 그의 호텔에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는 파리 개선문 바로 옆, 1920년대에 지어진 5성급 숙소에 묵고 있다. 너무나 고풍스러워서 당장이라도 그레이스 켈리나 데이빗 니븐이 엘레베이터에서 나올 것만 같은 곳이다. 너무나도 미래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그에게 생뚱맞다 싶을 정도의 부조화랄까. 다만 Richie는 아내를 위한 깜짝선물로 예약을 했다고 서둘러 해명한다. 간밤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지 눈 밑에 다크서클이 드리운 그는 해어진 데님팬츠에 낡은 부츠, 전형적인 테크노 올블랙 차림을 하고 주변이 너무 웅장하고 화려해서 당황스럽다며 키득거린다. 하지만 대화가 그의 공연과 전반적인 삶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자 그는 집중도를 되찾더니 마치 디제잉을 할 때와 같이 빠른 전환과 점진적인 전개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는 주목할 만한 수사적 어투를 가지고 있다. 전형적인 캐나다식 부드러운 톤에, 질문이 많고, 과장을 하는 법이 없지만 말을 더듬거나 주저함 없이 물 흐르듯 단어들을 쏟아낸다. 가끔은 정치인이나 CEO 연설 등 좋아하는 주제로 대화를 몰고 가기도 하고, 어떤 아이디어나 질문에 대해서 마치 이전까지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한껏 깊이 있게 파고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탐구심과 자신감의 조합은 어린 시절부터 장착된 것이다. 그는 아홉 살까지 옥스퍼드셔(Oxfordshire) 북부에서 부모님과 동생 Matthew와 함께 자랐다. Hawtin 가족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화목하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아름답도록 평범해. 히피나 보헤미안도 아니고, 그냥 오픈마인드셔. 아빠는 항상 내향적이셨는데 전자기기와 음악을 정말 좋아하셨어. 아마 그게 엄마아빠를 (외국으로) 떠나게 한 자극제가 된 걸지도 몰라. 영국, 이 섬과, 대처리즘(Thatcherism) 같은 것들의 사고방식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에 대한 호기심 말이지.” 그의 아버지가 외국에서 기술직을 구한 것은 바로 이런 호기심과 모험심 때문이었고, 1979년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의 당선 직후, 그의 가족은 캐나다로 떠났다. 그것은 믿음의 도약이었다. Richie는 말한다. “(원래는) 뉴질랜드에 가기로 했었어.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과 너무 멀어지는 게 덜컥 겁이 나서 포기했던 거야. 하지만 곧바로 부모님은 포기했던 걸 후회했고, `좋아, 다음에 또 기회가 오면 그땐 무조건 가는 거야` 라고 정했대. 그러고 맞은 기회가 온타리오의 윈저(Windsor)였던 거지.”

막상 캐나다에 도착하고 나니 어안이 벙벙했다. “차도 크고, 거리도 크고, 머리 위에 전선들 하며, 저 멀리 보이는 디트로이트... 그때가 겨울이었어서 진짜 추웠어. 우리 다 감기에 걸렸지. Matthew랑 나는 무슨 외계인이 된 기분이었어. 말도 다르게 하고. 하지만 그건 완전히 새로운 모험의 시작이었지.” 그는 계속해서 팀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주제로 돌아간다. 그의 가족은 서로의 별난 집착을 응원했다. Matthew는 어려서부터 비주얼아트에 대한 꿈을 좇았지만 Richie는 아빠를 닮았다. “난 기술적인 것들을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했어.” 처음에는 좀비영화와 특수효과를 좋아해서 그런 것들을 모방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려고 하다 보니) 프로그래밍에 대해 알게 됐고, 혼자 앉아서 이 가상의 공간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우고, 게임을 만들고, 초기 BBS 전자게시판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했어.”





그러다 음악이 그 모든 것들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모가 수집한 Kraftwerk, Tomita 등 여러 초기 신스 레코드들 덕분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Richie는 10대 시절부터 윈저의 클럽들에서 틀어주는 고스, 뉴로맨틱, 인더스트리얼, 디스코, 펑크가 뒤섞인 80년대 음악을 사랑했고, 음악 만큼이나 사람들을 사랑했다. "관중들은 흑인, 백인, 동성애자, 이성애자 등 모두가 화장을 하고, 앤드로지너스 룩을 하고, 중고 의류를 입었어. 실험정신이 투철했지.” 1986년, 열여섯 살 Richie가 디트로이트에 가기 시작하면서 그의 경험은 배로 강렬해졌다. Juan AtkinsDerrick May가 초기 하우스와 테크노를 온갖 다양한 사운드와 버무리는 것을 보면서 그는 마치 `미친 과학자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Blake Baxter, Ken Collier, Scott Gordon 등의 DJ들을 숭배하다시피 했고, (이후에 Scott Gordon은 The Shelter에서 그의 멘토가 되기도 했다.) 매일 밤 라디에오에서 Jeff Mills (당시에는 The Wizard)의 음악을 들었다.

그는 음반들을 사 모았고, 디제잉을 했고, 씬의 에너지를 한껏 즐겼다. 약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The Shelter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콜라를 권했을 때 크게 놀랐고 집에 돌아와 그 일을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침 6시, 8시까지 쌩쌩했다. 윈저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렇게 느꼈다. “진짜 기이한 씬이었어. 그 다른 곳에서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조명등이 번쩍이는 이 검은 공간에서는 모두들 자기 자신을 발견했지.”

그러다 1989년에 John AcquavivaDaniel Bell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녹음장비들을 잔뜩 가지고 있었다. “909, 303, 808, 101, Pro 1... 시퀀서에 싱크를 맞추고 음을 하나, 둘, 셋, 그러고 재생을 누르면 난데없이 스피커에서 테크노가 나오는 거야!” 세 사람은 1년도 안 되어 Cybersonik을 결성하고 ‘Technarchy’를 발표했다. 디트로이트 펑크에 순전한 인더스트리얼 분노를 결합한 이 곡은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고 심지어 영국의 Fabio and Grooverider 등 프로토 하드코어 DJ들에게도 선택받았다. 이와 동시에 Richie는 F.U.S.E.라는 이름으로 좀 더 딥하고 블리피(bleepy)한 테크노를 만들고 있었다. 그들은 Derrick May의 Transmat이나 Juan Atkins의 Metroplex를 통해 음반을 내길 꿈꾸었지만 자신들의 우상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대신 직접 Plus 8을 세웠다.





한 해가 더 지나갔고, 그의 `시도`는 진지한 국면에 돌입했다. Richie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Plus 8은 어엿한 사업이 되었다. 그는 유럽에서 빠르고 견고하게 관계성을 쌓아갔다. “제일 먼저 영국, 그 다음엔 이탈리아와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이건 물론 Sven (Väth)이었고. 1990년에 New Music Seminar에서 그를 만났거든...” 일부는 야망이었고, 일부는 더 넓은 음악세계에 대한 원대한 호기심이었다. “우린 원래부터 Mute Records, Nitzer Ebb, Front 242를 좋아했고, Speedy J 같은 사람들도 네덜란드에서 우리에게 음악을 보내왔어... 그래서 우리가 야심을 가지고 세계에 초점을 맞췄던 건지, 아니면 그냥 세계적으로 마음을 빼앗겼던 건지는 모르겠어..” 어쨌든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Richie는 John과 함께 일주일 내내 레이블을 운영했는데 완전히 DIY 스타일이어서 주문을 받고, 음반을 보내고, 제작소와 창고가 디트로이트에 있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여러 차례 미국과 캐나다를 오갔으며, 주말에는 좀 더 크고 와일드한 레이브를 즐기기 위해 유럽에 갔다. 그는 WARP와 손을 잡았다. WARP는 F.U.S.E 앨범을 인공지능 `테크노 감상` 시리즈의 일환으로 확대시켰고, 이는 Richie가 IDM 무브먼트의 발판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Plastikman이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내게 되는 Novamute와도 이 시기에 만났다.

90년대는 그렇게 흘러갔고, John과 Richie는 테크노가 앞으로도 지속될 지 전혀 알 수 없었다. "1년이라도 더 갈 수 있을지 절대 몰랐어!" 물론 테크노가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대신 답답함이 쌓이기 시작했다. 테크노 자체가 더 하드하고, 더 딱딱하고, 더 마초적인 색을 띄었다. “너무 많은 음반들이 나왔는데 대부분 평범한 수준이었어.” 일도 힘들었고, Richie는 1996년에 미국 입국이 임시로 금지되면서 디트로이트에 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는 취업허가증으로 디제잉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DJ들에게는 취업허가를 발급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그는 수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디제잉을 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가 처음으로 5천 명 앞에서 공연한 것은 베를린의 Mayday에서였다. “진짜 죽을 것 같았어!”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결국엔 그것도 빛을 잃고 다른 일과 다를 게 없어졌어. 그냥 더 이상 재미가 없었어.” 그래서 그와 John은 1998년에 Plus 8을 닫았다. 그가 런던으로 이사하는 것을 고려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이때 테크노를 뒤로 하고 떠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대신 그는 M-nus를 세웠다. 음악과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전부 벗겨버리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이었다.

음악적인 전환이 즉각적이진 않았지만 대대적이었다. 지금 들어도 강력한 1999년의 EFX & 909 믹스앨범을 들었다가 2001년의 ‘DE9’의 좀 더 느리고 펑키하고 무디한 그루브를 들어보면 Hawtin의 사운드 변천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DE9`는 좀 더 작은 규모, 특히 베를린의 클럽들과 백룸의 좀 더 특이하고 덜 남성중심적인 씬의 사운드를 대표한다. Richie는 그곳에서 Ricardo Villalobos 같은 글리치한 음악적 부적응자들을 만났다. 100가 넘는 트랙들의 작고 작은 섹션들을 디지털 컨트롤러로 라이브 믹싱한 DE9는 그가 완전히 디지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기점이기도 했다. 당시 그와 John Acquaviva는 Final Scratch 컨트롤러와도 관련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런 종류의 디지털 트랙 조작이 뜰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MNML`이 유럽 전역에서 뜨기 시작하던 2005년, 그는 베를린으로 거처를 완전히 옮겼다. 그가 기억하는 M-nus 팀은 `실험적이고, 놀기 좋아는 사람들이 모인 멋진 무리. 창작의 온상이었으며 음악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아주 모험적`이었다. Bar25 같은 이비자의 파티들과 베뉴들, 베를린의 Der Visionaere는 퇴폐적이기로 유명했다. “80년대 말에 디트로이트에서 보냈던 순진했던 시기와 아주 딴판이었지!” DJ 세션이 한 번에 이삼일씩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운영방침은 Plus 8 때와 같았다. “소문들 다 진짜야. 진짜, 진짜로 미쳤던 시절도 있어. 하지만 그 중간중간이랑 평일에는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도 하고, 작업실도 가고, 수영 같은 거도 하고 그랬어. 한 해가 시작되면 반드시 한두 달, 어떨 때는 세 달도 쉬어 줬고, 좀 희한하게 밸런스를 유지하긴 했지.”

그리고 M-nus는 기름칠을 정말 잘한 기계처럼 세계적인 클럽 앤섬을 쭉쭉 뽑아냈고, 규모와 첨단기술을 대폭 늘린 공연들을 탄생시켰다. 이는 Contakt 이벤트 시리즈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Richie는 Magda, Troy Pierce, Marc Houle, Gaiser, Heartthrob와 함께 신비롭게 빛나는 큐브를 사용해서 라이브공연을 펼치곤 했다. 모든 것이 환상적이고 파격적인 공상과학적 언어와 이미지로 꾸며져 있었다. 그것은 절정인 동시에 본질적으로 집단의 종말이기도 했다. 참가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가고 있었고, Richie는 다시 한 번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할 때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2010년대 초에 Plastikman을 부활시켜 풀 라이브공연을 진행했지만 그것은 정말 디제잉이었고 그때부터 그의 주된 관심사는 ‘Decks, EFX & 909’, ‘DE’9, 2005년 ‘DE9 Transitions’와 함께 시작한 기술적이고 심미적인 테마들이었다. 그 결과가 `CLOSE Combined`다. 라이브 장비들과 대형 아레나를 위한 다중채널 디지털 디제잉으로, 팬들이 정확한 세부요소를 볼 수 있게끔 모든 프로세스가 공개되어 있다.

그 배후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다. 기술에 대한 그의 애정과 더불어 새로운 `시도`임은 분명하고, 그는 여전히 AI에 대한 큰 꿈을 꾸고 있다. "내가 실시간으로 틀고 있는 것에 어울릴만한 다른 뮤지션들의 모티브를 제안할 수도 있고, 그걸 만든 뮤지션들과 나를 직접 연결해줄 수도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부에노스 아이레스 같은 곳에서도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상호작용을 위해 음악을 트는 거야." 하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방어막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많은 관중 앞에서 공연하는 게 익숙해졌지만 스스로 이방인이 된 것 같고 노출된 것 같다고 느끼는 부끄러움 많은 너드(nerd)도 여전히 그의 안에 있다. 그래서 그는 실제 가족과 함께 할 때도(그는 여전히 Matthew와 함께 일하고 있고, 그의 부모님 역시 그의 공연에 온다), 그가 만든 창조적이고 사업적인 팀들과 함께 할 때도, 지속적으로 스마트 그래픽 브랜딩을 할 때도, 무대에 정교한 기술 셋업을 할 때도, 심지어는 말을 하다가 즉흥적인 발언을 할 때에도 그는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체계를 구축한다. 그는 타고난 모험심으로 점점 더 많은 관중에게 다가가고자 노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처음 출발지점이었고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그런 작은 클럽들이 가장 편하다고 한다. 마치 기술혁신이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그를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로부터 보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긴장감 덕분에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Richie는 한편으로는 `기술은 이제 사업이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90년대 말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글로벌 씬의 반복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베뉴는 점점 커지고, 셋은 점점 짧아지고, 다양성은 부족하고... DJ들은 돈을 벌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돈만 벌고 빠졌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인 진보가 뚜렷한 흥분을 가져다주는 것일 뿐만 아니다. "이건 라이프스타일이고, 문화야. 그냥 전원을 꽂고 체크인만 하는 게 아니라 몇 년 동안 셋을 하고 체크아웃을 하는 거니까. 의미가 좀 더 있는 거지." 트럼프(Trump)와 권위주의, 브렉시트(Brexit)의 `비극`, 그리고 테크노 관중의 동질화에 직면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신념에 대해 목소리를 좀 더 높일 때야. 이 문화, 이 테크노 문화는 그 밖에 다른 곳에서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다양하고, 이상하고, 실험적인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곳들에서 탄생했다고."

"우린 너드였어." 그가 결론짓는다. "고스(goth)족, 여장남자, 흑인, 백인, 동성애자, 이성애자.. 모두가 음악과 파티로 모였었지. 그걸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 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서도 책임을 질 필요가 있지. 우리는 이런 DJ 라이프스타일에 낭비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래서 나나 우리 팀은 비행을 할 때마다 탄소상쇄(carbon offset: 배출된 이산화탄소의 양만큼 온실가스 감축활동을 하거나 환경기금에 투자하는 것)를 해. 우리가 이걸 2007년에 발표했을 때엔 아무도 관심이 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더 많이 하기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아. 어쩌면 사람들도 이제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랬으면 좋겠어.” 늘 그렇듯이, 변화와 발전, 진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그는 열정이 넘친다. Richie Hawtin이 이번에는 일렉트로닉뮤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정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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