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오늘날 댄스뮤직의 대가로 소리 없이 성장하고 있는 Bonobo
그 어떤 힙한, 혹은 대대적인 음악적 운동과도 무관한 Si Green
글: Joe Muggs 사진: Dove Shore, Visionseven | 2017-02-19
Bonobo 팬들은 와일드하다. 막 자정을 넘긴 시간, Si Green이 신보 ‘Migration’을 선보이기 위해 6시간짜리 DJ 셋을 시작한지 한 시간 정도 된 시점인데 런던의 커다란 창고 지하공간은 이미 흥 넘치는 각양각색의 관중으로 북적거린다. Green이 음반을 내기 시작한 1999년에 초등학생이었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술을 마시고, 삼삼오오 무리 지어 춤을 추는 모습은 여느 클럽이나 파티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덱이 있는 야트막한 스테이지 앞 공간에서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앞을 보고 빽빽하게 들어서서 모든 튠의 모든 디테일에 심취한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러다 Bonobo의 2013년 트랙 ‘Cirrus’의 차임이 그가 플레잉하던 슬로모 하우스와 디스코로 페이드인되자 다들 광포하게 날뛰기 시작한다. 바람직한 광포함이다. 허공으로 주먹을 내지르고, 사생결단으로 인스트루먼탈 멜로디를 따라 부른다. 모시핏만 안 만들 뿐이다.

전반적으로 다운템포나 칠아웃 뮤직으로 분류되는 공연에서 보기 힘든 분위기이지만, Bonobo는 음악적 생태계에서 독특한 입지에 있다. 그 어떤 힙한, 혹은 대대적인 음악적 운동과도 무관한 Si Green은 Bonobo라는 커리어로 미국을 정복하고 런던의 Alexandra Palace를 지배했다. 그의 하우스나 테크노 DJ 셋 티켓은 불티나게 팔린다. 온라인 DJ 셋의 조회수는 수백만에 달하고, 막대한 수의 팬 커뮤니티가 트랙리스트의 모든 디테일을 탐독한다. 그의 앨범들은 이제 Amon Tobin과 The Cinematic Orchestra 등과 함께 이벤트로 발매되며 Ninja Tune을 21세기 음악의 대표주자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래서 앨범 발표가 있었던 날 아침, Green을 만나기 위해 사우스런던에 있는 Ninja Tune 사무실에 찾아가보니 건물 전체가 떠들썩했다. 우리 믹스맥이 도착할 때 즈음, 평소에는 한가로운 PR맨이 어울리지 않게시리 우리가 제시간에 도착하는지 미리 확인한다고 전화를 거는 바람에 우리 전화기에도 불이 나고 있었다. 이따가 BBC와 해외 언론사들과도 인터뷰가 잡혀있단다. 마침내 도착하자 레이블 직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소셜미디어와 다른 발표들을 동시에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는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확실히 기대감과 흥분으로 가득 찬 분위기였다. 그리고 폭풍의 눈 중심에는 우리의 주인공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Green은 솔직히 말해서 슈퍼스타 DJ의 아우라를 풍기지 않는다. 뭐, 그가 스스로 ‘테크노인들의 유니폼’이라고 부르는 그 검은색 롱 티셔츠에 어두운 청바지, 보드화는 전형적인 DJ 차림새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Richie Hawtin이라기 보다는 크리에이티브 산업에서 꽤 선전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파티를 좋아하는 친구 같은 느낌이다. 곧 40세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오히려 약간 흐트러진 느낌이지만 추레한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게다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느낌을 주는 DJ들 특유의 널부러짐 없이도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앉을 줄 아는 사람이다. 마지막 앨범 투어에 꼬박 3년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인생의 흉터를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는 논리 정연하다. 믹스맥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를 곱씹어보고, 본인 말로는 ‘남에게 자기 얘기를 잘 안 하는 타입’이라지만 그 어떤 질문에도 대답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신의 가까운 관계 외의 주제에 대해서는 굉장히 오픈 마인드다.



레이브와 휴식 중에서 고르라면?
요즘엔 대부분 느긋하게 쉬면서 지내. 하지만 그게 균형이라는 거 아니겠어? 시즌에 따라 다른 것 같아. 레이브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늘 발 한 짝은 레이브 안에 들여놓고 살고 싶은데 그 시간이 예전만큼 긴 것 같지는 않아.

비스킷과 케이크 중에서 고르라면?
케이크. 그냥 요즘엔 비스킷이 잘 안 먹히네. 입맛을 들인다는 그런 건가… 자세히 설명하기가 힘들어.

재즈와 포크 중에서 고르라면?
아이구야… 재즈랄까. 그냥 재즈가 좀 더 폭넓은 거 같아서. 우리 부모님은 포크 뮤지션이셨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재즈가 좀 더 개인적인 발견에 가까운 것 같아. 진기한 그루브를 통해 올드한 힙합 음반들로부터 재즈로 거슬러올라가서 거기서 또 확장되는 거지.

미국식 아침식사와 영국식 아침식사 중에서 고르라면?
[한참을 생각하더니] 영국식. 그런데 아마 요즘 LA에 지내면서 영국에 자주 못 다녀와서 고향생각에 그런 걸 수도 있어. 난 미국 음식도 좋아하거든.

가장 좋아하는 공룡은?
가장 좋아하는 건... [한참을 생각하더니] ...흠, 나는 익수룡을 되게 좋아해. 일단 그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는 장점부터가 특별하고, 하늘을 날 수 있는 거대한 파충류라 하면 멋있잖아? 통 볼 수가 없는 거니까. 익수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냥 생각해보면, 걔네가 포식자인가? 아니면 그냥 경치 구경하면서 날아다니는 애들인가?





Green은 시골에서 자랐다. 원래는 햄프셔(Hampshire)에 있다가 서섹스(Sussex)로 옮겨 갔다. 그가 말한다. “할 것 투성이지. 사운드시스템이랑 약 잔뜩 챙겨서 숲으로 드라이브를 가곤 했어. 불 피우고 그냥 그렇게 놀았지. 그거 아니면 마을 광장에서 놀다가 불량배들한테 얻어 맞는 거였지.” 그러면서도 그가 자란 환경은 교양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제약업계 종사자였지만 그는 아코디언 연주자로 포스트히피 포크 씬에서 어느 정도 유명했다. Green은 말했다. “어머니는 변변치 않은 배경에서 자라셨음에도 문학박사까지 하셨어. 내 누이들하고 내가 집을 떠나고 오래 후의 일이지만. 두 분 다 최근에 돌아가셨지만 정말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걸 배웠지.” 사춘기 즈음 자연스럽게 브라이튼(Brighton)에 끌렸고, 그곳에서 평생친구들을 사귀고 보다 절충적인 클럽 씬에서 빠르게 디제잉을 시작했다.

90년대 말 즈음에는 Quantic과 Rob Luis와 함께 Phonic:Hoop 클럽나잇에서 레지던시를 하고 있었다. 힙합과 하우스, d’n’b 등과 더불어 브라질과 아프리카 튠까지 들을 수 있는 제대로 된 파티 세션이었다. Green은 여전히 그런 나잇파티를 가장 편한 집처럼 여긴다. 그는 Gilles Peterson의 DJ 세션과 런던의 Sofrito 창고파티에서도 핵심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각양각색으로 살아가는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그냥 딱 맞게 섞여있는 곳이었어. 사람들이 약간 빠진 새벽 두세 시가 지나서야 살아나는 사람들이었지. 그때는 정말 춤을 추고 싶은 사람들만 남거든. 그때야 비로소 나와 맞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야!” 1999년, Luis가 Tru Thoughts 레이블을 시작하고 Bonobo의 음악을 냈다. 특출한 황홀감을 주며 시타 현을 튕기는 ‘Terrapin’이 네 번째 릴리스였고, ‘Animal Magic’이 그 레이블의 첫 앨범이었다.

이 음반들은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Terrapin’ 이내 칠아웃의 정석이 되었고 Green은 좀 더 규모 있는 Ninja Tune과 계약했다. 당시 Ninja Tune은 90년대의 성공 이후 오랫동안 개혁과 안정을 거치느라 바쁜 시기였다. 하지만 Green은 늘 Tru Thoughts 팀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곧 행동반경을 넘어서는 DJ 부킹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Green은 그를 얼떨떨하게 만드는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내가 난해한 힙합물에 빠져있었거든. 그래서 관중을 보면 온통 아웃도어웨어와 백팩 차림의 심각한 남자들이 샘플러로 가득 찬 테이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어. 그들은 아프로비트와 디스코트랙이 잔뜩인 내 음악에 맞춰 춤 출 준비가 안 되어 있었지.”

하지만 그는 신경 쓸 것 없다고 생각했다. 고향과 유럽에서는 완벽하게 잘하고 있었으니까. Ninja Tune에서 앨범을 두 장 더 냈고, 그의 프로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그러다 2006년 말, 그가 이전에 함께 일한 미국 프로모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 나 기억하지? 요즘 다시 공연 거리 찾고 있거든.” 그들은 Green에게 자그마한 공연 대여섯 개를 잡아줬고, 매 공연티켓이 즉시 매진되는 현상에 깜짝 놀랐다. 그 시점에서 Green은 자신이 마이스페이스(MySpace)라는 파일공유 네트워크 및 인터넷 메시지 게시판의 세계에서 우상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미국에서는 내가 되게 신비로운 존재더라고. 무슨 유니콘처럼 말이야. 내가 속세를 떠났다, 투어는 절대 안 한다 뭐 이런 온갖 루머가 돌고 있었어.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왔지!’라고 변명해댔고 말이야.” 몇 달 후, 베뉴들의 크기가 배로 늘어난 또 다른 투어가 잡혔고, 그조차 즉각 매진되었다. 그때부터는 폭풍과도 같은 상승기세였다.

이런 꾸준한 성장의 배후에는 Green의 일하고자 하는 의지의 역할이 크다. 수요가 있다면 그는 투어를 떠난다. 처음에는 DJ로서였지만 점점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라이브밴드로 활동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일을 즐기기까지 한다. 2010년에 Andreya Triana와 콜라보한 ‘Black Sands’는 또 다른 대성공이었고, Bonobo 라이브공연은 미국과 전 세계의 대형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그때부터 처음으로 버스로 투어를 하기 시작했어. 투어매니저며 뭐 없는 게 없었고 모든 공연이 매진이었기 때문에 걱정할 게 하나도 없었지. 특별히 내가 [화학적으로] ‘충전된’ 상태를 유지시켜주고 싶어 했던 남자도 한 명 있었어. 지금은 그걸 다 하지는 못해. 열다섯 살은 젊은 척하는 40대 남자들을 잔뜩 보다 보면 약간 우울해지거든. 아무튼 굉장히 기능적이었지. 늘 누가 뒤를 닦아주고, 책임질 것도 없고, 그냥 되게 쉬웠어.”

이 투어 광은 2013년의 ‘The North Borders’ 후에도 길바닥으로 나섰다. 그의 6인 밴드는 여섯 명의 로드 크루와 함께 2년 간 거의 내내 세계를 여행하는 라이브 투어를 시작했다. “투어는 폭풍처럼 다가와서 모든 것을 부숴버려.” 그 당시 그가 즐기고 있었던 뉴욕생활과 연애는 투어가 시작되면서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바람에 넘어지기 보다는 그 위에 올라타기로 결정했다. 그 어디에도 뿌리를 두지 않고, 돌아갈 집도 만들지 않았다. 밴드가 Alexandra Palace에서 마지막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도 DJ로서 그 이듬해까지 멈추지 않고 투어를 계속했다. “끝에 갈수록 뭔가 되게 이상해졌지. 하지만 흥미로운 생활방식이었어.”





정치적인 편이야?
적극적이진 않은데 정치를 무시할 순 없는 법이지. 요즘 같은 때는 더 그렇고. 최근 우리가 그리고 있는 궤도를 생각해봤을 때, 고개를 넘으면 뭐가 있을지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아. 사람 살기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아. 내 입지를 활용해서 목소리를 낼지는 잘 모르겠어. 자기가 있는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갖고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또 다르거든. 그리고 일단 뭔가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 하면 거의 대치 상태로 끝나버리니까. 그냥 스트레스 받기 싫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가 먼저 자극하지는 않는 편이야.

이번 앨범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얻었으면 좋겠어?
단일한 점들을 이어주는 연결에 대한 거야. 공통된 맥락 말이지.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과 위치에 맞게 만든 각자의 히스토리, 특정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통된 지점에서 어떻게 생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지, 그러면 또 그게 어떻게 다른 것들과 다른 이야기들에 상호적으로 연결되는지. 이게 정치적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 직설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이주(migration)가 논쟁적인 주제라는 거 자체부터가 그렇지. 우리는 이주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살고 있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봐.





그의 방랑생활이 ‘Migration’의 테마와 사운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번 앨범은 Green이 자신의 커리어를 통틀어 해왔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다. 은은하고 럭셔리한 테스쳐에 수 놓인 라이브 악기와 정교한 일렉트로닉… 하지만 정서적으로 볼 때 Migration은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온 중 가장 깊이 있고 낯선 음반이다. 하지만 이 음반과 지금까지 수면 바로 밑에 숨겨져 있던 Green의 온갖 하우스와 재즈, 펑크, 글로벌 느낌의 DJ 셋들을 이어주는 것은 굉장히 개인적인 관점을 만들어낸다. 뿌리가 없다는 Green의 설명과 조화를 이루는 무중력의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기치 못하게 강력한 정서적 펀치를 날린다. 그래도 LA에 정착해서 그곳에서부터 클럽월드로 통하고 있는 그는 자신이 현재 위치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을 비롯한 Four Tet과 Jon Hopkins 같은 동료들을 위한 장소가 있는 모던한 뮤직 씬이 있는 곳 말이다.

DJ 공연에서 브라이튼 시절부터의 Green의 옛 친구들 한 무리가 무대 옆에서 춤을 추며 Bonobo 컬트의 다양한 표현을 두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프랑스 팬들은 그의 음악을 두고 초 섹시하다고 말한다. 미국인들은 모든 디테일을 알려고 든다. 반면 Green 자신은 그저 계속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절대 템포를 부추기지 않고 그저 한 번에 한 그루브씩 관중에게 꾸준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있다. Talking Heads의 ‘Once In A Lifetime’과 Curtis Mayfield의 ‘Pusher Man’이 좀 더 딥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어우러진다. 무대 앞쪽의 하드코어 무리들은 Bonobo 튠이 나올 때마다 여전히 광포해지지만 그들 뒤의 관중은 정상적인 파티답게 끊임없이 서성이고, 춤을 춘다. 젠장, 정말 제대로 된 파티다. Si Green은 현대 음악에서 아마도 가장 크고 가장 의외의 성공의 물결을 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16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벽 3시에 창고에서 펑크에 몸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여전히 ‘그의 사람들’이다. 그는 여전히 그들의 것이다.



Ninja Tune을 통해 출시된 Bonobo의 ‘Migration’ 앨범을 지금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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