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Ben Klock과 함께 한 10일
행성급 테크노 DJ와 떠난 투어
글: Alasdair Byers 사진: Randolph Quan | 2016-11-25

후텁지근한 벤츠 뒷좌석. 깜빡 졸았나 보다. 아닌 게 아니라 간밤에 호텔에서 40분 밖에 못 잤다. 투어매니저 Randy가 조수석에 앉아 성미 급한 운전수에게 뭐라 뭐라 하고 있다. 여기는 시칠리아(Sicily)다. 아마도. 호텔은 공항에서 10분 거리지만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비행기 시간이 44분 밖에 안 남았다. 39분 남겨두고 Ben Klock이 등장한다. 언제나와 같이 정시에 딱 맞춰서, 섭씨 3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티셔츠에 어두운 회색 진, 선글라스 차림이다. 그가 올라타자 택시가 굉음을 내며 교통지옥을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우리는 각자 할 일에 집중한다. Randy는 칼 같이 온라인 예매내역과 게이트 번호를 확인한다. Ben은 8시간 뒤에 유럽 반대쪽에서 플레이할 셋의 최종 강약법을 결정한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을 껌뻑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휴대폰에 기록하려고 애를 쓴다.


Ben Klock의 투어 5일째다. 열흘 동안 셋 10개를 한다. 저널리스트를 대동하는 것도 사실 Ben의 아이디어였다. 베를린 출신인 그는 언더그라운드 철학의 정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일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인터뷰를 싫어한다. 그런 그가, 이번 투어에 Mixmag에게 인터뷰 대신 ‘그림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만취와 숙취, 아드레날린 폭주, 수면부족 사이에서 재미난 경험을 하고 있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는 여행의 첫머리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다.



8월 5일 / 21:42


프랑크푸르트 공항 출국게이트


베오그라드(Belgrade)로 향하는 비행기가 15분 지연됐다. 탑승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줄도 다 흩어졌다. 게이트 뒤쪽에, 올블랙 차림의 남자 두 명이 테이블에 앉아있다. 한 명은 스마트폰 삼매경, 다른 한 명은 스틸 레코드박스 위에 앉아 랩톱을 들여다보고 있다.


“공항에서 스트레스로 고뇌하고 있는 DJ라, Ben Klock 맞죠?”


Ben이 어리둥절하면서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통상적인 장례식 혹은 테크노 복장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내 비치팬츠와 흰색 티셔츠가 영 어색해진다. 자신을 Randy라고 소개한 투어매니저가 내 손에 들린 두툼한 가방을 보더니 앓는 소리를 낸다.


그가 말한다. “충고 하나 하자면, 과음하지 말아요.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러자 Ben이 작은 유리병 여러 개를 꺼내 보여준다. “생강차예요. 수입산. 카페인 같은 게 없는데도 이거 마시면 정신이 나요. 투어 중에는 더 이상 DJ가 아니에요. 운동선수지.”


말을 마친 두 사람은 조용히 일어서더니 게이트 줄에 능숙하게 새치기한다. 나는 줄 맨 뒤에 가서 선다. 뭐, 아직까지는 잘… 되고 있는 듯.



8월 6일 / 00:14


베오그라드 공항


“나만 따라와. 고개 숙이고. 탑승권 준비해놓고. 늘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보여야 돼.” Randy의 코치를 따라 기적적으로 모든 줄에 새치기하며 PP카드를 가진 Ben과 보조를 맞추다 보니 마침내 주차장이다. “폰 충전해놨어? 좋아. 두 시간 반 뒤면 공연이다. 이동하는 데 세 시간이야.”



00:56


Randy는 마치 스위치를 내린 듯 잠에 빠진다. Ben은 랩톱을 켜고 Rekordbox로 10초짜리 루프를 번갈아 틀고 있다. “셋 준비해?” “아, 아니. 이번 건 다 끝냈지. 이건 며칠 뒤에 Dekmantel에서 할 거야.” 그러더니 Ben이 날 보고 씨익 웃으며 말한다. “잘 수 있을 때 자 둬.”






03:16


세르비아 Lovefest / Set 1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창 밖을 내다보니 어떤 들판 같은 곳을 덜컹거리며 달려가는 중이다. 마침내, 눈을 비비며 차문을 열고 내리니 뜨거운 담배연기가 훅 끼쳐오고, 곳곳에 험상궂은 덩치들이 보인다. 세르비아로군. “좀 잤어? 잘했네!” 벤이 스틸 케이스를 집어 들며 말하더니 후다닥 달려간다. Randy와 나도 그 뒤를 따라 달린다. 한 프로모터가 우리에게 따라붙어 같이 달리면서 손목에 밴드를 채워준다. “6분 뒤에 무대 올라갑니다.” 누군가 동유럽 억양으로 말한다.


메인스테이지에 이르자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밀려온다. 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 경사진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다. Ellen Allien의 폭발적인 테크노 킥이 서서히 줄어들다가 정적과 업라이트가 무대를 채운다. 그러고는 관중의 함성이 터진다. Ben이 무대에 오르자 객석은 다시 조용해진다. Ben의 셋, Ben의 투어가 생명력을 얻으면서 서브베이스가 킥이 되더니, 멜로디가 되고, 퍼커션 훅이 된다. 무대 양 옆은 VIP들로 빼곡하고, 아래에 있는 관중들은 춤을 추다 모자라 펄쩍펄쩍 뛰어 오른다. Ben이 James Ruskin & DVS1의 ‘Page 1’을 플레이하자 우리가 있는 검은 부스와 우리 아래에 있는 관중석의 불빛, 지평선 위의 여명에 이 세상 같지 않은 분위기가 깔린다. Ben의 기계적인 셋이 진행될수록 열띤 강하감이 고조된다. 스내어와 하이햇이 희미하게 빛나는 언덕 꼭대기까지 흘러간다. 꾸준한 킥은 조금씩 빨라지다가 130 bpm까지 이른다. 불과 5시간 전만 해도 프랑크푸르트 공항이었는데…



14:17


“아니, 그러니까, 화장실에 문이 없다니까. 그냥 날개 달린 콜택시여.”


다시 베오그라드 공항으로 돌아가는 차 안, 우리는 개인항공기 화장실의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 토론하는 중이다. 식사도 걸렀고 잠도 두 시간 밖에 안 잤는데 커피빨인지 다들 쌩쌩하다. 첫 번째 셋이 끝나선지 Ben은 훨씬 느긋해 보인다. 나는 늦잠도 안 잤겠다, 아무에게도 방해를 끼치지 않아선지 뭔가 중요한 시험에 통과한 기분이다. Ben과 Randy는 각자의 랩톱을 꺼내 Randy가 간밤에 촬영한 영상과 사진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Ben의 투어매니저일뿐 아니라 Ben과 Ben의 레이블인 Klockwork의 공식 포토그래퍼다.


그가 말한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는 ’언더그라운드’를 유지하면서도 기사에 실릴 수 있도록 늘 고민해.”



20:38


로마 FCO 공항


Ben이 입을 연다. “투어에서 가장 힘든 점이랄 게 없는 게, 투어 자체가 가장 힘들거든. 하지만 투어를 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호텔이나 맛집을 발견한다든지 나만의 장소들을 여럿 갖게 되는 건 있어. 여기도 그 중 하나야.” 밥집 하나 찾겠다고 로마 피우미치오 공항을 도느라 25분을 들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모차렐라와 레드와인을 폭풍흡입하면서 드는 생각이, 여긴 절대적으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것.


“난 좀 락밴드가 부러운 게, 락밴드는 6달은 투어하고 6달은 스튜디오에 있잖아. 그러니까 너가 나한테 완전 뻔하게 물어봤던 첫 번째 질문에 답을 해보자면…” Ben이 말을 하다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질문 같은 느낌만 안 들면 어떤 것이든 질문할 수 있다는, 분명 미리 정해놓은 건 없는데 둘 다 합의하고 있는 게임을 하고 있던 터였다. “프로덕션은 무슨?! 내가 바로 주구장창 투어를 하면서 곡 작업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이잖아.”



8월 7일 / 03:55


시칠리아 Afrobar / Set 2


나는 열심히 모래밭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Ben과 다른 비행기를 타게 됐는데 그게 또 지연된 거다. 응급상황에는 운전수를 겸하고 있는 프로모터 Enriquo를 따라 콘크리트 벽을 넘어 검은 커튼을 지나 지나가던 사람을 의도치 않게 들이받고 나니 목적지다. Randy가 날 보고선 Ben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한창 플레이를 하고 있던 Ben이 몸을 휙 돌리더니 외친다. “올~ 왔네!” 그가 씩 웃으며 샴페인 잔을 건넨다. 관중은 천 명에 달하는데, 다들 젊다. Enriquo가 외친다. “여긴 이탈리아에서도 특별합니다. 어린 애들도 팝 안 들어요. 테크노를 듣지.” Ben도 좀 더 편안해 보인다. 세르비아에서 했던 것보다 업페이더를 강하게 조작하는 등 모험도 더 많이 한다. 자기 플로우에 푹 빠졌다. 덱이 내뿜는 뜨거운 파란 조명과 뜨거운 바닷바람이 만난다. Ben은 네 객의 덱을 종횡무진 누빈다. 멀리서 보면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하는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서 큐잉을 하고 저기서 페이딩을 하며, 루프와 퍼커션을 짜릿하면서도 안정적으로 큐레이팅하고 있다. 하늘은 흐릿한 핑크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Void 모니터들에서는 눈에 땀나게 하는 오디오가 흘러나오고, 관중들의 발 뒤꿈치까지 밀려와서 찰싹거리는 바다의 수평선 위로 태양이 떠오른다.



10:52


“망했다. 5시간 안에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야 돼.”


벤츠 뒷좌석. Ben이 늦잠을 잤다. Randy는 정신줄을 놓고 있다. 나는 칫솔을 놓고 나왔다. 엉망진창이다. 마침내 Ben이 도착한다. 20분도 못 잤단다. “눕긴 누웠는데, 알잖아. Dekmantel이 오늘이니까, 그래서...”



11:44


공항은 인산인해였다. 사람들로 어찌나 미어터지던지, 사실 보안을 통과하는 게 엄청나게 쉬웠다. 내 항공권이 먹히지 않았는데도, 수하물 스캐너가 삑삑거리는데도, 어째선지 우리는 계속, 계속 걸었다. 드디어 비행기 안이다. Ben이 곧장 자리에 앉더니 Ableton 에디트로 트랙들을 확인한다. 8시간 뒤면 Dekmantel이 시작된다. 뭐, 그 뒤로도 투어는 잔뜩 남아있지만. 밀려오는 잠을 떨쳐낼 수가 없다. 다만 꾸벅꾸벅 졸다가도 Ben을 보면 커피나 아침식사도 거절한 채, 진지한 표정으로 랩톱을 들여다보고 있다. 다들 로마 공항에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



18:37


암스테르담 Dekmantel, Boiler Room Stage / Set 3

Ben이 백스테이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데, 무슨 운동선수를 보는 것 같다. 사실 비행기에서 내린 후부터 마주치는 모든 계단에서 이런 운동감각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그가 말한다. “응, 꽤 긴장돼. 만 명 앞에서 공연한다 해도 한 순간이면 긴장이 안 되는데, 이건 영원히 남는 거니까. 믹스의 모든 순간이 분석되고, 점검되고, 평가 받는 거 거든”







19:05


Ben은 땀이 날 때 쓰라고 주최측이 준비해준 검은색 타월 대신 자신이 준비해온 흰 타월을 꺼낸다.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다. “내 럭키타월이야. 근데 한 개가 아니고 다 달라. 그냥 내가 묶는 호텔에서 가져오는 것들이거든.” 덱 위에 올라서는 Ben의 신경이 날카롭게 선 듯 하다. 여기저기에 카메라가 있다. 영리한 레이버들은 뒤에, 팔걸이의자 전문가들은 앞에, 디렉터들은 옆에 자리잡았다. 천장에 달린 스포트라이트의 열기가 뜨겁다. 환호하던 관중이 신호에 따라 침묵한다. 경기 스포츠 같은 디제잉. Ben이 백스테이지에서 목과 어깨를 푼다. 1라운드. 준비. 시작!


막상 공연이 시작되니, 지금까지 걱정한 게 무색해진다. Ben의 셋은 그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을 90분으로 압축한 것 같다. 강하게 시작했다가 15분 만에 초음속 순항 상태로 들어가 능수능란하게 테크노와 정통 하우스를 넘나든다.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오른다. 고개를 까딱거리던 움직임이 어깨의 들썩임으로 바뀐다. Ben은 땀 범벅이지만 그의 믹싱은 여전히 타이트하다. 그의 시그니처 스내어와 베이스라인에, 뜨거운 공기가 연극무대공간을 가득 채운다. 30분 남은 시점부터, 마침내 그 자신도 무대를 즐기는 것 같다. 셋 막바지. 여기 저기에서 조금씩 더 재량을 발휘한다. 덱 위에 서면 좀 더 즉흥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셋이 끝나고, 베를린, 혹은 테크노, 혹은 Ben에 대한 긴 모놀로그가 이어지지만 Ben은 듣고 있지 않다. 그는 20분 뒤에 또 다른 스테이지에서 Dekmantel 클로징 셋을 펼친다.



21:30


UFO Stage / Set 4


이제는 모두가 웃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튠의 물결 속에 이것저것 실험도 해본다. 막 자기 셋을 끝내고 놀러 온 Marcel Dettmann과 얼싸안으며 반가운 인사도 나눈다. “응. 이제 다 끝나서 한결 가뿐하네. 한 잔 하자!”



8월 8일 / 22:48


이탈리아 Gallipoli


“엉, 나 포켓몬 매니아였어. 지금 말고 90년대에. 그때가 훨씬 끝내줬지.” Marcel Dettmann이 사뭇 진지하게 말한다. 해안가 식당에 Klock과 Dettmann의 팀원들 16명 정도가 모였다. Ben은 저녁 내내 웃고 농담을 던지고 있다. 그의 퍼포먼스가 어땠을 지에 대한 마지막 의심은 한 시간 전 Randy가 보여준 하나의 밈을 계기로 모두 사그라졌다. Boiler Room의 페이스북 페이지 왼쪽에 달린 코멘트 중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런 말이 써있었다. “누가 Ben Klock의 Boiler Room 셋만큼 거칠게 좀 해줬으면.”


이제 Ben은 와인 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해산물을 조리해서 먹는 것과 생으로 먹는 것의 장점부터 자기 고향 베를린이 어떻게 해서 더 외부지향적으로 바뀌어가고 있는지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하고 있다. 단어공부까지 한다. 호저를 뜻하는 ‘porcupine’이 이탈리아어로는 ‘땅-바다 부랑아’라는 발음과 얼추 비슷하다는 말에 화들짝 놀란다. 비록 그 정보를 알려준 사람이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탈리아인 슈퍼모델이란 것에서 비롯된 반응인 것 같긴 하지만. 마침내, 무리는 차 세 대에 나눠 타고 Cave Gallipoli의 모퉁이를 돌아 떠난다.



8월 9일 / 01:18


Cave Gallipoli / Set 5


Marcel과 Ben이 B2B 셋을 위해 무대에 오른다. 대략 잡아 1,500명의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있다. 덱에서는 흥미로운 역학이 생겨나고 있다. 외향적인 Marcel이 믹서를 맡아 페이더를 번쩍이며 묵직한 드랍을 시전하고, Ben은 자신의 큐일 때조차 한 켠에서 EQ와 이펙트를 꼼꼼하게 조작한다. 그러다 새벽 2:30부터는 Marcel의 큐에 대응적으로 플레이하던 것을 멈추더니 일련의 재빠른 트랙변환으로 퍼포먼스의 급을 높인다. 관중 역시 한결 뜨거운 반응으로 화답한다. Marcel은 스내어의 벽을 쌓아 올린다. 둘은 이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미소 짓고 있다. 마치 경쟁하는 남학생들 같다. Marcel이 체육소년이라면 Ben은 체스소년의 느낌이다. 둘이서 신스와 라이저로 구성된 젠가탑을 쌓아 올린다. Ben은 그 동안 내내 극단의 긴장과 이완 사이에 가느다란 선을 그려놓고 있다. 아래에 펼쳐진 광란의 바다는 수평선 너머 어딘가에서 또 다른 테크노가 펼쳐질 약속을 기다리며 모든 후크와 모든 변화에 의지하고 있다. 관중은 이미 무아지경이다. 새벽 5시 30분, Ben이 부스 위까지 기어오르는 인파를 겨우 빠져 나온다. 우리는 이동식 화장실 뒤로 요리조리 이어지는 옆길을 따라 애프터파티가 시작되는 장소의 백룸에 도착한다. 우리의 휴대폰 은닉처다.



8월 10일 / 23:54


사르디니아


약간의 숙취를 느끼며 부티크 호텔에서 로마 공항으로, 로마에서 사르디니아로, 거기서 지금껏 본 중 역대급으로 럭셔리한 호텔로 이동하는데 하루를 다 보냈다. 이제는 말쑥한 이탈리아 프로모터들 한 무리가 우리에게 와인공세를 펼치고 있다. 정중하게 시작했던 분위기는 분위기 프로모터들과 Ben이 나폴리에 대한 썰을 풀기 시작하면서 이내 웃음바다로 바뀐다.


와인 다섯 병에 회 4킬로그램 째였을 때, 프로모터에게 온 전화 한 통에 돌연 분위기가 바뀐다. Allen & Heath 믹서가 DJM 600으로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이 아니다. Ben이 오디오 품질과 EQ 기능을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 간단한 문제는 절대 아니지만. Ben이 말한다. “부스는 투어 내내 바뀌면 안 되는 거야. 어디에 있던 똑 같아야 하는 유일한 거라고. 그러니까 라이더를 쓰는 거고. 관중 수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고, 오디오가 약할 수도 있고 빵빵할 수도 있어. 모든 사람과 교감하려면 내 작업공간만큼은 내 집 같아야 돼. 투어를 할 때는 부스가 곧 집이야.”



8월 11일 / 02:31


Ritual Club / Set 6


어젯밤에는 Cave(동굴)라는 이름의 베뉴에 있었는데 오늘은 말 그대로 동굴이다. 버튼셔츠에 드레스, 모히토와 샴페인… 관중 분위기도 다르다. 이탈리아 인스타그램 엘리트 판이랄까. 웜업 공연이 두툼한 테크노로 분위기를 띄우며 제 역할을 잘 해주었지만 부스에는 긴장감이 돈다. 결국 Allen & Heath 믹서를 받아내긴 했지만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 Ben이 덱에 섰을 때의 환호성도 뭔가 평소 같지 않다. 다만 관중들은 차분하게 어깨를 들썩인다. 늘 하던 대로 20분간 강력한 테크노로 상승궤도를 타고 나자 안전벨트 사인이 꺼지더니 오늘 밤은 Floorplan의 ‘Never Grow Old’로 깊이 있는 소울 분위기로 간다. 이게 통한다. 엄청나게. Ben이 몸을 돌리고 씨익 웃더니 샴페인 잔을 집어 든다. “아 몰라! 마셔!”


Ben이 더 깊게 들어갈수록 관중도 흠뻑 빠져든다. Ben이 궤도를 천천히 돌려 익숙한 직설적 영역으로 옮겨가자 관중도 기꺼이, 혹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온다. 이탈리아 스타일에 맞춰 파티가 25분 일찍 ‘끝나’ 여유시간을 잔뜩 얻은 Ben이 추가적으로 튠을 줄줄이 뽑아주자 이제 관중은 축구 응원가 같은 걸 연호한다. 가사를 번역해보자면 “쟤네는 안 가. 그런 뜻이야. 어쩔 땐 한밤중부터 계속해서 노래를 하지” 라고 프로모터 Mirko가 부스에서 외친다.



07:31


올나잇 카페에서 애프터파티를 하는 중이다. 맥주 파인트 속에 보드카 샷을 넣는 방식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컨셉이다. “스코틀랜드 출신도 깜짝 놀랐어!” Ben이 웃음을 터뜨린다. Mirko는 여자친구와 싸웠단다. Ben이 Mirko의 폰에 용서를 구하는 진심 어린 영상메시지를 만들어준다. Ben은 녹초가 된 것 같지만 편안해 보인다. 나는 침대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내일은 쉬는 날이라, Mirko는 다른 계획들을 가지고 있다.



8월 12일 / 23:27


핀란드 Flow Festival / Set 8


다들 다시 모였다. Ben은 24시간 동안 쉰 뒤, 안코나(Ancona)에서 셋을 하나 플레이했다. “해변 스테이지 각도가 좀 이상했는데, 그래도 꽤 괜찮았어.” 우리는 36시간 동안 베를린에 있었는데, 그 중 28시간은 다시 투어로 복귀하려고 안달하면서 보냈다. “투어 완전 마약 아니냐? 멈추지 않는 아드레날린이 그립지 않았어?” 나는 쉴새 없이 채워지던 술잔들, 낯선 이들과 함께 한 술집투어, 미수에 그친 싸움들과 공포에 질린 캐나다 학생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런 듯.” 일부 DJ들이 절제를 못하는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메인스테이지 커튼 뒤에 앉아 생강차와 사과를 먹고 있자니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온 느낌이다. 웜업 공연이 커튼을 뒤흔드는 132bpm 킥을 연타하자 Ben이 마지막으로 수정한 것들을 빠르게 확인한다. 경기를 앞둔 것 같은 특유의 기대감은 이제 익숙한 흥분, 갈망이 되었다. Ben이 커튼을 제치고 나가 덱 왼쪽 아래에 자신의 유일한 여행가방인 스틸 레코드박스를 펼쳐놓는다. 샴페인 병과 정 사이즈 유리잔, 럭키타월이 덱 옆에 비치되어 있다. 베뉴는 친밀한 실내 공연장이다. Ben이 강렬하고 고조적인 킥과 베이스로 시작해서 자정 직후에 테크노 크루즈로 자연스럽게 전환한다. 전율을 일으키는 광범위한 베이스라인이 텐트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차가운 핀란드의 공기 중에 울린다. 파란 레이저 불빛이 관중을 어지럽게 비춘다. 문득 DJ가 보는 플로어와 조명, 부스는 관중이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주파수가 다른 것이다. 관중은 제자리에서 뛰어오르는 것 비슷한 몸놀림을 한다. 지난 밤 무대에 난입하던 이탈리아 타투쟁이들과 비교해보면 훨씬 제정신들인 것 같다. “다들 공연에 빠져 있어. 그냥 핀란드 사람들이 원래 이래.” 누가 백스테이지에서 한 마디 한다. 셋이 끝나자 관중은 정중하게 박수를 친다. 룸 뒤쪽에서 누가 외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고마워요, Ben!” 기온 탓이겠지.



01:48


“내가 거치는 단계들이 있어.” 2만 원짜리 테이크아웃 피자를 가지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Ben이 말한다. “어쩔 땐 플레이를 할 때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좋을 때도 있고, 또 어쩔 땐 Jeff Mills 분위기로 가는 걸 좋아하기도 해. 다른데 신경 끄고 음악에만 집중하는 거지. 그런가 하면 그냥 노는 것처럼 플레이할 때도 있어.”







8월 14일 / 00:19


바르셀로나 DGTL Festival / Set 9


주인 없는 골프카트를 타고 바르셀로나의 산업지구 꿀관광을 즐긴 후, DGTL의 백스테이지에 도착했다. 이제 적응 완료다. 스포트라이트가 내리 쬐고 5미터 거리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집이라는 것. 여기서 Marcel의 팀과 다시 만났다. Marcel과 Ben이 서로에게 장난을 걸며 담배를 교환하고, 각자의 술잔을 숨기는 동안 그 둘의 투어 매니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피곤한 웃음을 짓는다. 애들이 노는 걸 지켜보는 부모의 심정이랄까.


“DGTL 좋아. 무대 세팅이 낮거든. 부스가 거의 땅 높이에 있어.” Ben이 말한다. 밤 12시 44분에 마무리를 짓는다. 한껏 고양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관중석 쪽에서 나오는 연기와 레이저가 무대를 비춘다.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고, 그 열기는 엄청나다. Ben이 자신의 럭키타올로 땀을 닦고, 기획력 있는 한 스페인 사람이 부스에 침실표 티셔츠를 집어 던진다. Ben이 웃으며 티셔츠를 집어 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 레코드박스 안에 넣는다. 관중들은 하이파이브를 한다. 벌써 투어가 끝나가는 느낌이다. Ben은 센 튠들을 평소보다 일찍 플레이하고 있다. 담배도 약간씩 피고, 덱을 벗어나 백스테이지의 사람들을 얼싸안으며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부스에는 25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적극적인 소녀팬들, 기회를 엿보는 투어매니저들, 전술상 침묵을 지키고 있는 PR들이다. 술 판매대에는 신분증을 확인하는 직원이 자리를 떠날 때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가 빠지기를 반복한다.


새벽 2시 53분, Ben Klock이 Junior Boys의 ‘Like A Child’의 Carl Craig 리믹스를 플레이한다. 조명이 관중석을 파랗게 물들인다. 셋이 끝나자 관중석에서는 목청이 터질 듯한 환호성이, 백스테이지에서는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작별의 시간, 같이 셀카 한 장 찍어보겠다고 눈을 빛내며 어슬렁거리는 무리들에게 납치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텔로 작전상 후퇴를 한다.



18:42


베를린 Berghain / Set 10


“15분 뒤면 무대에 서야 하는데… 어, 잠깐. 왔네.”


나는 Randy와 함께 서서 Berghain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끝 없는 줄을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은 꾸준히 입장을 거절당하고 있다. 마침내 번호판에 ‘BEN’이라 적힌 검은색 BMW가 와서 멈춘다. Ben이 내린다. 바르셀로나 DGTL 이후에 단 세 시간 잤을 뿐이다. 그나마도 한 시간은 베를린에 도착하고 나서다. 그와 함께 줄 앞으로 가서 입구에 다가가니 도어맨이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Ben이 우리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더니 옆문으로 사라진다.



18:58


Ostgut Ton 나잇이 열리는 Berghain 메인룸이다. 부스의 디지털 판독기를 보니 Marcel이 108 데시벨을 찍고 있는 중이다. 공기는 뜨겁고 땀으로 부옇다. 높은 천장에도 불구하고 밀폐된 느낌의 공간이다. 드문드문 설치된 조명과 두 개의 흰 투사조명, 빨간 레이저 몇 가닥만이 칠흑 같은 어두움을 겨우 밝히고 있다. 오래된 느낌과 미래적인 느낌이 공존한다. 촛불을 밝힌 바 뒤의 벽에는 마케도니아 풍의 선반이 열을 이루고 있다. 부스 뒤에선 바맨이 Ben에게 생강차를 가져다 주는 것으로 의식의 스타트를 끊는다.


Ben은 뭔가 달라 보인다.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소매를 잘라낸 티셔츠, 피트된 청바지, 그 불가사의함과 한결 같은 친근함과 산만함이 Berghain에 완벽하게 어울린다. Ben도 붙박이처럼 부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느긋해 보인다. 마치 누워서 떡 먹듯 자물쇠를 따는 전문 금고털이범 같은 느낌이 있다. Ben이 114 데시벨로 들어가자 미묘하긴 하지만 반응이 있다. 분위기가 한껏 뜨거워지는 게 느껴진다. 관중의 몸놀림도 좀 더 빨라지고, 우주선 같은 흰 스캔조명도 덩달아 빨라진다.


내가 Ben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지도 열흘이 되었다. 투어를 하는 DJ는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부스를 떠나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럽 어디에 가도, 세계 어디에 가도 파란색 파형과 루프, 템포, 다양한 사람들, 언어, 떠오르는 태양은 늘 똑 같다. 투어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하는 게 아니다. 부스에 서 있는 동안 주변의 도시들과 장면이 바뀌는 시간여행이다. 그렇게 좀 지나다 보면 ‘밖’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어색해서 뜨거운 다운라이트와 왼발로 조작하는 헤드폰 큐를 통해 위안을 얻을 뿐이다. 하루라도 쉬는 날이 있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루 빨리 투어에 복귀하고 싶어 안절부절 못했다.


그 뜨거운 꿈을 좇기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도, 일도 포기하고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다. 돈이나 유명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애프터파티는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다. 그냥 팽팽했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거다. 오르막길을 오르는 등 뒤를 밀어주는 가속도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건 현실이 아니라는 느낌이 얼핏 들 때도 있다. 밖에서는 현실이라는 슬립스트림이 흐르고 있는데 나는 이 부스 안에 꽁꽁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다수의 DJ들의 경우, 이상한 호언을 한다든지, 난해한 명분에 집착하는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런 부분이 드러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가 플레이하는 음악의 속도 빠른 단순성에 보조를 맞추기 바빠 다른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Ben Klock에게는 디제잉을 초월하는 또 다른 보편적인 라이프스타일이 있다. 그가 이탈리아의 동굴에서 플레이하든, 세르비아의 페스티벌에 서든, 몇 분 눈 붙이고 비행기에서 방금 내렸든, 방금 침대에서 빠져 나와 Berghain으로 꺾어 들었든, 그에게는 기술적인 기교나 인지도 혹은 대대적인 마케팅, 댄스뮤직 등의 장르에 대한 유행을 초월하는 게 있다. 이 불가사의하고 초연한 캐릭터가 덱 뒤에 섰다 하면 댄스플로어의 사람들과 진실된 교감을 이룬다. 열광하는 스페인인이든, 차분한 핀란드인이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많은 DJ들이 바라지만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걸 이렇게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살인적이고, 피곤하고, 새로운 시야를 가져다 준 행운.


셋을 마친 Ben이 부스에서 폴짝 뛰어나온다. 나도 그 뒤를 따르다가 잠시 멈추고 그 자리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여기까지가 좋은 것 같다. 그는 관중 속에 파묻혀 긴장을 푸는 중이다. DC10 Ibiza까지 혹독한 18시간이 남아있다. 그 다음 셋이, 그 다음 황홀경이, 그 다음 부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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