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진은 연기, 미술, 음악, 전시, 연출 영역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인 예술 표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아티스트 입니다. 2008년 [반성의 시간] 정규 앨범에서 언어를 배제한 [심플렉스] 앨범 시리즈로 이행하는 동안 백현진의 일-작업은 더욱 간결하고 단순한 방향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백현진에게 작업은 기술, 감각, 마음을 알맞게 운용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깨끗한 즐거움을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번 인터뷰는 특히 음악가로서의 백현진에 대한 대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삶과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핵심적으로 요약했습니다.
Interviewer: 박민천
Photographer: 선우현
Q. [심플렉스: 담담함안담담함 라운지]를 자주 돌려듣습니다. 걸어다닐 때, 쉴 때, 운동할 때 그냥 배경음악처럼 틀어놓으면
50분이 금방 흘러갑니다.
그렇게 사용하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든 앨범입니다. 풀렝스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드문 시대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한 청소년기에는,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테이프나 LP를 처음부터 끝까지 풀렝스로 듣곤 했습니다. 그 시절 앨범 단위로 음악을 들으며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그때의 습관이 훈련이 되어, 음악가로서 작업하는 지금도 이 기준을 가지고 앨범을 만듭니다. LP 기준으로 A면과 B면, 각 면마다
20~25분, 총 40~50분 정도의 흐름을 고려하며 풀렝스 앨범을 구성합니다.
Q. 뮤지션들이 앨범을 발매하고 나면 자기 음반은 잘 듣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이번 [심플렉스: 담담함안담담함 라운지]
앨범은 어땠나요?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첫 번째로 고려하는 대상은 제 자신입니다. 작업물을 마무리하여 대중에게 공개할 때, 제 성에 찬 것을 발표하기 때문에 스스로 제 결과물을
즐기는 편입니다.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완성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기에, 작품에 마침표를
찍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제가 만든 물건은 제 방식대로 소비하며, 불특정 다수가 제 작업을 소비하는 것은 제 손을 떠난 일이므로,
그다음부터는 각자 잘 사용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Q. [반성의 시간]이 단편 소설집이라면 [심플렉스] 시리즈는 추상화를 감상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반성의
시간]은 20대 말에서 30대 초까지 썼던 곡들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젊은이가 만든 앨범입니다. 그 이후 [심플렉스] 시리즈가 나오기까지
20년 이상이 흐르는 동안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편의상 구상과 추상을 나누어 말하자면, 추상의 장점 중 하나는 각자가 자유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인데, 저는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그 장점을 방향 삼아 변화해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플렉스] 시리즈에서는 작정을 하고 언어를
배제했습니다.

Q. 시간이 지나 변화한 작업물에서도 진한 감정과 서사성이 여전히 두드러집니다.
미술가,
음악가, 배우, 연출가 등, 저의 직업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다루는 일입니다. 이는 결국 기술을 바탕으로 감각과 감정을 다루는 작업입니다.
세 가지 모두 중요합니다. 기술을 기반으로 특별한 감각을 더해,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집중합니다. 다만 기술이 먼저 드러나는 작업은 지양합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걸 지향하며, 부자연스러움을 의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색한 가운데 기술이 감지되는 작업에는 전혀 흥미가 없습니다.

Q. 어쿠스틱 인스트루멘탈에서 엠비언트나 노이즈로 음악의 재료가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취향이 변하신 걸까요?
피아노,
기타, 베이스, 드럼 같은 전통적인 밴드 악기를 사용할 때는 함께 작업하는 연주자들과의 관계가 생깁니다. 반면, [심플렉스] 시리즈는 전자 악기를
기반으로, 마스터링을 제외한 전 과정을 오롯이 혼자 수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저는 사운드 디자인에 집중하고, 마스터링은 슈테판 베트케에게
맡깁니다. 2000년대 초반, 베를린의 Raster-Noton 레이블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디깅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 디페시 모드의
마틴 고어 개인 앨범을 인상 깊게 들었는데, 마스터링한 사람이 바로 Raster-Noton의 음악가이자, 제가 관심 있게 듣던 슈테판 베트케(a.k.a
Pole)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스터링 방식은 주파수를 아슬아슬하게 정리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소리를 다룬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마스터링을 의뢰했습니다.
Q. 음악 작업물의 트랙 숫자, 레이어링이 점차
간결해지고 있습니다.
심플렉스
작업으로 국한해서 말하자면, 한두 트랙만 가지고 하루 종일 만질 때도 있고, 그 결과가 만족스러우면 그걸로 끝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작년에 일민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최근의 그림도 많이 단순해졌습니다. 단순해지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요소 하나하나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요즘은 점점 노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는데, 일상도, 작업도 더욱 단순하고 담백하게 운용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집니다.
Q. 백현진님의 작업 루틴이 있나요?
예전에는
나에게 작업 루틴이나 체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가만히 돌아보면, 그나마 루틴이라고 할 만한 건 아침에 일어나 레몬즙을 마시는 것과 반신욕을
하는 일입니다.

Q. 줄곧 피아노라는 악기를 굉장히 자주 사용했습니다.
음악가로서
다른 연주자들과 협업할 때는 연주자가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운 좋게도, 저는 피아노를 특별하게 다루는 음악가들과 꾸준히 협업해오고 있어요. 한편,
혼자서 전 과정을 수행하는 ‘심플렉스’ 시리즈 가운데 작년에 발표한 《심플렉스: 담담함안담담한 라운지》는 피아노가 주요 악기인 앨범이라,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겠네요. 제가 피아노를 직접 연주할 때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저만의 피아노 소리를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 피아니스트들이
낼 수 없는 다른 소리를 만들어내려 노력합니다.
Q. 다르다는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수정하거나 개선, 발전시키려 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변화하고, 변형되는 삶을 꾸리려 합니다. 변화하고 변형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달라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다르다’는 저에게 매우 중요한 가치입니다.

Q. [반성의 시간]이 만들어질 즈음에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리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셨다면 [심플렉스] 시리즈 이후 요즘은
어떤 지점에서 쾌감을 느끼시나요?
작업하는 과정은 기술, 감각, 마음을 운용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일에 맞는
기술을 바탕으로 감각을 예민하게 사용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작업하다 보면 깨끗한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순간이 참 좋아요.
Q. 음악은 이기적인 작업에 가까운가요, 이타적인 작업에 가까운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 작업 결과물의 첫 번째 대상은 저 자신입니다. 작업을 마친 뒤에는 그 결과물이 대중에게 잘 사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연히 뒤따릅니다.

Q. 달라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제가 젊은
분들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 대신, 성실히 작업하여 결과물을 꾸준히 선보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Q. 독자분들께 마지막 한마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