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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ecret DJ가 업계의 40년을 조망하다
댄스뮤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글: The Secret DJ 일러스트: Tiago Majuelos | 2020-02-11
MIXMAG UK가 섭외한 정체를 밝히지 않는 현역 DJ가 업계의 지난 40년을 돌아보았다. 시크릿 DJ의 글을 통해 지난 날 영국의 상황들을 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살펴보자.


2020년을 보내다 보니 두 가지가 떠오른다. 90년대 초 심야 TV 쇼 `유로트래쉬(Eurotrash)`의 공동진행자 Antoine de Caunes가 `디케이드(decade: 10년)`를 의도적으로 `딕헤드(dickhead: 병신)`로 발음하곤 했던 것과, 어쨌든 10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병신 같은 지다. 나는 이제 40년째 DJ를 하고 있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는 10년처럼 느껴지지도 않지만 말이다. 여기서 서른 살도 안 된 DJ들이 자기 프로필에 `20년 동안 음악을 틀어왔다`고 써놓고 다니는 것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미안하지만 돈 받고 음악을 트는 날부터 시작이다.

80년대는 암울한 10년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어디서 보냈느냐에 따라 또 다르다. 돈을 뿌려대었던 발레아레스 죽돌이들은 80년대 하면 외곽 레이브 파티와 스마일, 덩거리 복장과 밴다나를 떠올리겠지만 99퍼센트의 영국인들은 폭압적인 새 법의 발뒤꿈치에 짓밟히고 있었다. 그래도 80년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참신함과 미래주의, 유니크함이었다. 암울한 정부정책에도 약해지지 않는 에너지가 있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파티를 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내 윗 세대가 자기들이 그걸 1년 전에 했다며 날더러 짝퉁이라고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80년대에 승리를 거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래도 90년대는 확실히 우리 차지였다. 90년대는 그냥 우스웠다. 차기 노동당 정부(중도좌파)가 전국적인 정당을 만들었고 무엇이든 가능할 것만 같았다. 90년대가 어땠을까 궁금하다면 그냥 EDM이 미국을 뒤덮은 때를 보면 된다. 우린 거침이 없었고 낙천적이었으며 매 순간 취해 있었고 진지한 것은 싫어했다. 어딜 가도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돈이 있었다. 광적인 10년이었고, 어느 순간을 돌아봐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이 없다. 좋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2000년이 도래했다. 파티가 정말 많이 열렸다. 순식간에 지나간 꿈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지탱하던 버팀목이 일순간 기울어졌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해졌다. 어느 순간 슈퍼클럽의 시대가 끝나 있었다. 욕심을 부린 댓가였다. 2천년 대에 DJ들이 받던 말도 안 되는 임금은 거품이 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처음으로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DJ들이 등장하고 있었고 프로모터들은 DJ들에게 들어가는 엄청난 돈을 보고는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살면서 한 번도 디제잉을 해본 적 없는 수많은 프로모터들이 레지던트를 자처했고, 반면 실력이 꽤 괜찮은 DJ들이 형편 없는 돈을 받고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티켓을 팔면 여전히 돈을 벌었지만 중급 DJ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집객을 못해도 그에 비해 상당한 임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씬은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 잡아 갔다. 허접한 지원과 매번 똑같은 헤드라이너, 언제 어디서나 돈이 전부인.

그 다음 10년, 황무지 같았던 2000년부터 2010년 사이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고 성질이 꽤 난 중급 DJ들이 막후에서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즐기는 것에 대해 눈쌀을 찌푸리는 매우 심각한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술행위로서의 디스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 초반은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재미있게 보냈으나 그게 길진 않았다. 다행히 음악은 최소한의 거품 밖에서 정말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일렉트로클래시(electroclash)`로 시작했던 것이 기본적으로 `새로운 음악`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게다가 `누레이브(nu rave)`까지 반짝하면서 다채로운 색깔로 모든 지루한 것들을 몰아냈다.

뭔가 분위기가 재미있어졌다 싶자 마자 이내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복수의 날을 갈던 토리당(보수파)이 돌아왔고 모두가 빈털터리가 되었다. 빤짝이 디스코는 미니멀리스트 아트갤러리라고 주장하는 우중충한 남자들(어김없이 남자들이고 언제나 지겹도록 우중충하다)이 최종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비사를 버리고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이 현상이 이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다. 이제 마지막인 것이냐고 질문하는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씬이 정말로 종말을 맞이한 것인가?

나로서는 이 시기를 분명하게 조명해준 사건이 하나 있다. 이 격변의 시기에 전 Space Terrace에서 굉장한 레전드의 바로 앞 순서에 공연을 한 날이었다. 그는 내 영웅이었다. 그때 내가 틀었던 음악은 Terrace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당시 유행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약간 진부해지고 있던 박수소리와 플라멩코 기타, 봉고를 활용하는 행복한 스타일보다는 좀 더 어둡고 신선하고 테크노에 좀 더 가까웠는데 관중의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모험적인 선곡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분위기를 한껏 띄워 놓고 만족감에 젖어서 바톤터치를 했는데 그는 뚱하고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마지막 레코드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런 쓰레기 때문에 내가 은퇴를 하려는 거야."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후의 시간들과 그의 은퇴는 사운드의 변화가 오랫동안 지속될 것임을 증명했다. 시대의 흐름 앞에 장사는 없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지만 두 가지의 변화가 상황을 타개했다. 첫 번째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데이글로(day-glo) 미국인들이었고 두 번째는 나고 자란 환경 덕에 아는 것이 매우 많은 젊은 유럽인들이었다. 딥하우스와 새로운 테크노, 그리고 EDM이 우리를 먹여 살렸다. 2010년부터 젊은 에너지의 물결이 케케묵은 불만분자를 몰아내며 도처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댄스뮤직이 이렇게나 오래, 이렇게나 강력하게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내가 그 일원이라는 점도 실로 엄청난 영광이다. 댄스뮤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이 시간이 오래도록 이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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