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1984년 뉴욕: 댄스뮤직이 문화가 된 바로 그 때, 바로 그 장소
NYC가 대중문화를 영원히 변화시킨 시기였다
글: Michelangelo Matos 콜라주: Lawrence Abbott 사진: Bill Bernstein, Getty Images, Freepik | 2019-11-11

미국에서 댄스뮤직이 그 자체로 문화로 자리잡은 때의 중심은 1984년이다. 디트로이트의 Cybotron이 첫 번째 앨범 `Enter`를 발매한 해이기도 하다. 싱글 `Techno City`는 그들의 포스트일렉트로 사운드에 새로운 이름과 애티튜드를 부여했다. 시카고에서는 Larry Sherman이 Precision Record Labs Ltd.를 세워 현지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저렴한 신스와 드럼머신으로 만든 음반들을 빠르게 전달했다. 곧 이 사운드는 `하우스`라는 이름을 얻었고 Sherman은 새로운 레이블 Trax Records를 세워 하우스 음반들을 발매했다.


그러나 그러한 스타일이 예고하는 혁명은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1984년, Arthur Baker, François Kevorkian, Shep Pettibone, Jellybean Benitez, Larry Levan이 메이저급 레이블의 팝과 r`n`b, 락 공연에 12인치 믹스를 소개한 덕분에 클럽음악은 이전과는 달리 US 팝 차트에 섞여 들어가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각종 브레이크댄스 영화들과 첫 번째 Run-DMC 앨범 덕분에 힙합 붐이 일었다. 하지만 힙합은 대체로 댄스뮤직의 또 하나의 측면일 뿐이라고 여겨졌다.


1984년의 새로운 클럽사운드 중 가장 핫했던 것은 디스코로 곧장 회귀한 Hi-NRG로, 본질적으로 Patrick Cowley가 Sylvester를 위해 작업한 프로덕션의 신스 위주의 사운드의 최신 버전이었으며 하우스와 테크노, r’n’b, pop의 인위적인 사운드에 앞서 있었다. 이 이름의 기원은 Billboard가 `맹렬하게 후려친다`고 표현한 Evelyn Thomas의 음반 ‘High Energy’이다. 이 아이코닉한 게이클럽 앤썸은 1984년 9월에 US Hot 100의 하위권으로 진입했다.


안타깝게도 Cowley는 자신의 선구적인 작품이 호응을 얻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82년 11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Tommy Boy Records를 세운 Tom Silverman은 이렇게 말했다. "1984년 즈음, 에이즈가 음악업계를 유린하고 있었어. 댄스뮤직업계의 중심은 특히 심했지. 원래 댄스뮤직 비즈니스를 구축한 게 바로 게이였어." 그리고 Hi-NRG는 명백하게 게이 스타일이었다. 모두가 그 점을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Smash Hits와의 인터뷰에서 Hi-NRG는 믿을 수 없는 남자들에 대한 비탄을 여성이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게이뮤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남자가 부르는 거였으면 이해하겠지만 말이다." Smash Hits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동안 얄궂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졌다."





‘High Energy’가 영향을 미친 직후, Stock, Aitken & Waterman의 프로덕션 팀이 판돈을 높였다. 이 트리오에서 아이디어를 담당한 Mike Stock은 Motown을 모델로 삼아 `기술적으로 끝내주는` 음반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Hi-NRG를 들었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정확하게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 퀄리티까지 더해서 말이야."


1984년의 첫 공격은 조롱이었다. John Waters의 언더그라운드 영화들에 등장하는 미국의 드랙스타 Divine의 ‘You Think You’re A Man’은 British Top 20에 진입했다. 고스(goth)스럽고 저질스러운 리버풀의 4인조 Dead Or Alive가 S.A.W.에 접촉했을 때를 Pete Waterman은 이렇게 회상했다. "Pete Burns가 진짜로 이렇게 말했어. `내 사운드를 Divine처럼 만들어 줘요!" 그 결과물인 ‘You Spin Me Round (Like a Record)’는 1985년 3월에 UK 차트 1위를 달성했고 댄스플로어뿐 아니라 가라오케까지 장악했다. S.A.W.는 차트 1위를 13번 달성하고 3천5백만 장의 음반을 파는 등 남은 80년대를 지배했다.


거대하고 남성적인 미국에서는 이런 것들에 대한 반응이 확실히 엇갈렸다. 그해 12월, 한 라디오 예상지에는 런던의 신스팝 트리오 Bronski Beat의 `Smalltown Boy`가 `감동적인 이야기를 엮어낸다`고 적혀있었다. `Smalltown Boy`는 가수 Jimmy Somerville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젊은 게이가 커밍아웃을 했다가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내용이다. 2주 뒤에는 똑같은 예상지가 Bronski Beat의 앨범 `The Age Of Consent`를 명백한 동성애혐오적 표현과 함께 악평했다. "이 호모 3인조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선동자들 중 하나다. 이렇게 멋진 음악의 가사가 이렇게 급진적이라니 부끄러운 일이다."


12인치를 여전히 빵 터지는 공격적인 실험의 현장으로 정의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영국의 프로듀서 Trevor Horn이었다. 그 해 1월, Horn은 Yes의 ‘Owner Of A Lonely Heart’로 미국에서, Frankie Goes To Hollywood의 ‘Relax’로 영국에서 동시에 차트 1위를 달성했다. 그 후 ‘Relax’는 차트에 재진입해서 7월에 후속작인 ‘Two Tribes’의 뒤를 이어 2위를 달성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 Frankie Goes To Hollywood는 5백만 장에서 6백만 장 사이의 음반을 판매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중 대부분이 12인치였다. 그들은 아직 앨범 한 장 발매하지 않은 상태였다.


8월 6일, Horn은 뉴욕의 New Music Seminar (NMS)에서 기조연설을 했다. 그날 아침에 Ed Koch 뉴욕시장은 그 주를 뉴욕의 공식적인 ‘New Music Week’로 선언했다. 본질적으로 수령자들의 요청에 따라 부여된 영광이었다. NMS를 공동설립한 Tom Silverma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PR회사가 그냥 뉴욕에 가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그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요청도 아니었다. 1980년 이래 NMS는 미국 음악업계의 주요 행사로 성장했다. 1984년에 열렸던 세미나에 참석한 유료관객은 3천8백 명이었다. 랩 레이블인 Tommy Boy Records를 운영했던 Silverman은 1982년에 Afrika Bambaataa And The Soul Sonic Force의 ‘Planet Rock’을 히트시켰는데 이것이 향후 3년간 지터리(jittery)한 일렉트로펑크의 유행을 몰고 왔다. (Bambaataa는 84년 NMS의 가장 중요한 참가자이기도 했다.) Silverman의 NMS 파트너는 캠퍼스 라디오 트레이드 시트인 Rockpool을 공동설립한 Mark Josephson과 댄스 레이블 Uproar의 Joel Webber였다. Silverman은 Rockpool이 퍼블리싱 뿐만 아니라 `춤 출 수 있는 락을 전문으로 하는 DJ들에게 음반을 배포했다`고 말했다.


80년대 초기 미국에서는 포스트펑크 디아스포라를 목표로 한 락 `디스코스(discos)`가 떴다. Rockpool이 시작되었을 때 Josephs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DJ들은 대부분은 사실 섞이는 걸 반대했어. 그들은 큐폰(cue-phone)을 쓰지도 않았고 음반들을 날림으로 끼워 맞췄거든. 락 DJ들은 짧은 믹스들을 선택했기 때문에 한 시간에 열두 곡 정도나 3~5셋 정도를 들을 수 있었어." `셋(set)`이라는 것은 같은 장르의 튠들의 컬렉션이었지만 헤드라인 DJ는 밤새도록 공연하는 것이 당연했다. 뉴욕 Fun House의 John ‘Jellybean’ Benitez는 하룻밤에 11시간 동안 공연했다. 그는 말했다. "밤새 피크를 찍었다 내려갔다 하지. 어쩔 때는 음반이 끝까지 가도록 두기도 하고, 음향효과를 넣기도 하고 또 다른 트립을 시작하기도 해."





1984년까지 팝 프로듀서들은 점차 댄스 프로덕션의 요령들을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 요령이라는 것은 DJ들이 비트매칭을 하기 쉬운 규칙적인 리듬, 두드러지는 베이스와 드럼, Paradise Garage 같은 클럽들의 휑뎅그렁한 공간을 휘저을 수 있는 풍성한 에코였다. DJ Larry Levan이 군림했던 곳도 바로 그곳이었다. 1977년에 뉴욕의 클럽들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1983년에 다름 아닌 The Smiths의 12인치 리믹스를 한 DJ 겸 리믹서 François Kevorkian은 작가 Tim Lawrence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락 클럽들의 DJ들은 다들 매주마다 Garage에 가기 시작했어. Larry가 공연을 어떻게 하는지 직접 들어봐야 했거든."


뉴욕의 대표적인 흑인음악방송인 WBLS의 Frankie Crocker는 절친한 사이였던 Levan과 함께 DJ 부스에서 어울리면서 즉흥공연을 방송에 내보내곤 했다. Billboard의 댄스 에디터인 Brian Chin은 6월에 Peech Boys와 Loose Joints의 독특한 컷들이 그랬던 것처럼 Strafe의 `Set It Off`가 뉴욕에서 상당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썼다. `Set It Off`는 Brooklynite Steve Standard의 최면적인 저예산 댄스트랙으로 808로 프로그래밍한 후루룩거리는 하이햇 패턴이 특징이다. Brian Chin의 요지는 Levan이 그 트랙을 Paradise Garage에서 틀고 있다는 것이었다. 곧 ‘Set It Off’은 80년대 동안 가장 많이 샘플링된 트랙 중 하나가 되었다.


Josephson에게 있어 클럽이 대중적 성공을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것은 달콤한 가치입증이었다. 그는 84년 세미나 즈음 Billboard 사설란에 이렇게 썼다. "뉴웨이브씬의 수많은 베테랑들이 이제 라디오와 Rockpool, 그리고 기타 인프라 요소들이 `주류`가 되어 버렸다는 것에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이것은 중대한 오해다. 락의 좌익은 중도로 이동하지 않았다. 중도와 우익요소가 좌익으로 이동한 것이다."


Silverman은 말한다. "1984년 즈음 되니 많은 음반들이 클럽 밖으로 나왔어.” 가장 궁극적인 사례는 1983년 10월에 나온 12인치인 Shannon의 `Let The Music Play`가 1984년 2월에 팝 차트 10위를 달성한 것이다. 80년대 말의 팝 스타일의 주축으로 떠오를 프리스타일과 라틴/힙합 하이브리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음반사들은 `어떻게 하면 이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Silverman은 말한다. "The New Music Seminar는 DJ의 관점에서 음악업계를 바라보고 있었어. 비즈니스의 모든 방면을 다루는 패널을 만들되 DJ 감성을 가진 사람들로 그 패널을 구성했어. 우리가 타고 있던 파도는 DJ 컬처의 성장이었어."


아무도 그것을 `디스코`라고 부르지 않는 한 `사업은 계속 성장했으나 1979년은 정말 침체기였고, 사람들이 찾은 희생양이 디스코였다`고 Silverman은 말한다. `뉴웨이브`라는 단어가 `제발, 펑크만 아니라면(please, not punk)`의 코드였듯이, 모두가 사용하기 시작한 새로운 용어는 훨씬 단순하고 훨씬 융통성이 있는 `댄스뮤직`이었다. 훨씬 짧은 기간 동안만 살아 남은 또 다른 용어는 클럽랜드의 새로운 패권을 주장하고자 하는 음악업계의 바람을 담은 `댄스지향적 락(dance-oriented rock)`, 일명 DOR이었다.





이 하이브리드 정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뉴욕의 클럽은 Lincoln Center 근처에 있는 Hurrah’s였다. Hurrah’s는 뉴욕의 클럽들 중 거대한 비디오스크린을 가장 먼저 설치하기도 했으며 Mudd Club 등이 그 뒤를 따랐다. 1984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비디오 클럽이 새로운 대세였다. Billboard는 이렇게 보도했다. "호텔과 레스토랑부터 오래된 디스코 댄스클럽들까지 최신기술을 접목하여 사업을 되살리고자 하고 있기 때문에 시스템 설치업체들은 하드웨어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 덴버(Denver)의 한 클럽은 라이브밴드에서 비디오로 강조점을 옮긴 뒤로 수익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Castro)에 있는 Midnight Sun, LA의 Revolver, 시카고의 Berlin과 Sidetracks 등 게이클럽들은 비디오를 빠르게 도입했다.


Billboard는 Danceteria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특별한 행사를 위한 콘서트 룸과 비디오 라운지, 댄스플로어, 프라이빗 라운지 등 네 개 층에서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한다. Keith Haring과 같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의 현대미술세계와 추상화가들과 조각가들의 세계를 통합하는 것은 그들의 작품을 공개할 통로를 필요로 하는 인구의 한 부분을 수반한다.”


Danceteria는 ‘Planet Rock’을 공동제작하고 1984년에 현기증 나게 바쁜 한 해를 보낸 Arthur Baker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Baker는 이렇게 말했다. "그곳은 매일 밤 열려 있었어. 스튜디오를 나와서 Danceteria에 가서 그냥 놀았어. 4층이 넘는 정말 멋진 클럽이었어. Jeff Beck과 함께 일할 때 그를 Danceteria에 데려왔지. 그를 Fun House에는 데려가지 않을 작정이었어. Danceteria는 락 요소를 가지고 있었어. Mark Kamins, Johnny Dynell, Freddy Bastone이 다 거기서 디제잉을 하는 등 음악이 끝내줬지만 좀 더 사교적인 장소였지. 내 음반을 테스트하기도 굉장히 좋은 곳이었어. 내가 내 음악을 Mark에게 가져가면 그가 그 즉시 틀어줬어. 그때 나는 춤추기 좋은 락 음반을 리믹스하고 있었어. 나한테 완벽한 테스트였지. 확실히 Danceteria를 위해 만들어진 트랙들이었어.”


특히 Baker는 Cyndi Lauper와 Bruce Springsteen을 리믹싱하고 있었다. Bruce Springsteen은 그 리믹스들 중 하나에 오버더빙 세션으로 참여했다. Baker는 말한다. "에어컨이 나갔는데 정말 심각한 열대야였어. Springsteen는 `아이고, 나가서 맥주 한 박스만 사올게`라고 했지. 그러곤 정말 맥주 한 박스를 사와서 우리랑 같이 놀았어." Baker가 진행한 Springsteen의 리믹스 세 가지 중 첫 번째는 그 해 봄에 Bruce가 Asbury Park에 있는 Club Xanadu에서 테스트했던 싱글인 ‘Dancing In The Dark’의 재작업이었다. 그는 관중이 그 튠에 확실히 춤출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메이저 레이블들이 12인치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장 주도권을 잡고 그 포맷을 키워낸 인디 레이블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 현상은 NMS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1984년에 Newcleus의 일렉트로 랩 `Jam On It`으로 히트를 친 Sunnyview Records의 Adam Levy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뭘 하면 메이저들은 두고 보다가 고쳐야 할 점만 해결한 다음에 큰 돈을 들고 나타나." 한 NMS 패널에서 Capitol Records 대표는 그의 레이블이 `12인치 시장의 알짜배기는 인디들을 위해 남겨놓고 싶다`고 말했다. 함께 패널로 참여했던 Run-DMC의 레이블 Profile Records의 Cory Robbins 역시 그의 말에 동조했다.


Arthur Baker가 선호한 것은 Danceteria였을지 몰라도 프리뷰 공연으로 신곡을 부지런히 소개하는 그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다른 클럽에서 만들어졌다. Midtown의 Fun House로, `Confusion`의 영상에서 보면 Baker와 New Order 회원들이 Jellybean Benitez가 댄스플로어에서 테스트해보도록 오픈릴 마스터테잎을 건네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Benitez는 1984년에 스튜디오에 완전히 집중하기 위해 Fun House를 떠났다. 그는 인기 리믹서가 되었는데 사귀던 여자와의 작업 때문만은 아니었다. Jellybean이 Madonna의 `Holiday`를 리믹스한 트랙이 차트 16위를 달성했을 때 Billboard는 이렇게 지적했다. "일을 하는 클럽 DJ가 프로듀싱한 팝 싱글 중 최초로 40위권 안에 들었다." 그가 이어서 리믹스한 ‘Lucky Star’와 ‘Borderline’ 모두 팝 차트 Top 10에 들었다. Madonna의 2집 앨범의 타이틀트랙 ‘Like A Virgin’은 그 해 12월부터 6주 동안 1위를 유지했다.


Cash Box 매거진은 Madonna의 성공을 `댄스씬의 영입, 원점으로 돌아온` 사례라고했다. Madonna는 Jellybean 전에 Danceteria의 Mark Kamins와 함께 작업하고 있었고 또한 연인 사이였다. Sire Records의 Seymour Stein은 Kamins를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대 최고의 대어를 발견한 참이었다. Stein은 그녀의 솔직담백함에 감명을 받았지만 이렇게 썼다. "여자 Elvis를 보고 있다고 믿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Warner Bros., 상사인 Mo Ostin은 Madonna와의 계약을 거부했다. Stein은 그가 Madonna의 음악을 `다운타운 댄스실험이며 무의미한 12인치 헛소리`라고 평가했다고 썼다. Stein은 이내 그녀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Madonna는 어딜 가든 항상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물리적으로는 그 공간에 없더라도 말이다."


Madonna의 대대적인 성공은 80년대 초에 뉴욕에 급증한 클럽 내 팝 활동의 당연한 결과였다. Jellybean Benitez는 최초의 진정한 `슈퍼스타 DJ`였다. 랩과 댄스, 락, r`n`b는 뉴욕의 댄스플로어와 80년대 중반의 Top 40 라디오에서 자유롭게 뒤섞였지만 80년대 말이 되면서 점점 장르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DJ 문화는 80년대 초의 문제들 이후 팝이 튼튼한 입지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제는 그 자신의 혁명만이 남아있었다.

법인명 : 주식회사 비엔엘컬쳐스 / 신문사업등록번호 : 서울, 아03924 / 신문사업등록일 : 2015년 10월 06일 / 사업자등록번호 : 279-86-00099 / 법인등록번호 : 110111-5843580 / 대표이사 : 홍유석, 이순섭 / 발행인 : 장태환 / 편집인 : (주)비엔엘컬쳐스 / 발행소 : 서울시 강남구 삼성로 150, 107-105 / 발행일자 : 2016년 4월 4일 / 전화번호 : 070-7772-4444 / 대표이메일 : info@bnl-global.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유석 / 특허등록번호 : 41-0375139-00-00 / 상표등록 제41-0375139호
Copyrights 2016 Mixmag Kore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