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1877 – 2017 턴테이블의 진화
이것이 없었더라면 댄스뮤직도 없었다
Thomas H Green | 2017-12-13

1877




140년 전, 프랑스에서의 획기적인 실험에 이어 미국의 위대한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Scientific American지에 턴테이블의 전신인 포노그래프(phonograph), 납관식 축음기를 최초로 공개했다. 캘리포니아 Menlo Park에 있던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신임 받던 인재 John Kruesi가 이 프로젝트를 맡음으로써 축음기의 실제 발명가가 되었다.

원통에 감은 얇은 주석호일에 바늘로 녹음된 사운드로, 니들을 통해 재생된 최초의 튠은 Kreusi가 부른 “Mary had a little lamb”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화기를 발명한 벨(Alexander Graham Bell)이 축음기의 호일을 밀랍으로 교체해 음질과 소리재생력을 높인 그래포폰을 들고 나왔다.





1887

또 다른 발명가인 독일계 미국인 Emile Berliner가 아연 원판으로 소리를 녹음하는 그래모폰 축음기의 특허를 냈다. 즉, 최초의 레코드판이었다. 아연은 이내 에보나이트(vulcanite)라는 합성고무로 대체되었다가 20세기 들어서면서 아시아에 서식하는 벌래의 분비물에서 얻는 셸락으로 대체되었다. 에디슨의 포노그래프가 기발한 ‘말하는 기계’로 여겨졌다면 National Gramophone Company는 시계장치의 메커니즘을 가진 그래모폰에서 음악과 오락의 가능성을 보았다. 셸락 디스크는 1940년대까지 그 본래의 포맷을 유지했다.





1907
이 즈음 10인치 양면 78RPM(분당회전수) 레코드판의 세계시장이 세력을 얻기 시작했다. 녹음음악의 초기 스타는 Nellie Melba와 Enrico Caruso 같은 오페라가수들이었다.



1917
디스크와 실린더가 음악 포맷 경쟁을 펼치고 있었지만 후자의 수요는 이제 격감되었다. 레코드판이 생산과 취급, 보관 등 모든 면에서 더 편리했다.



1927
전자식 레코드플레이어가 점차 태엽식 레코드플레이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전자식은 스프링을 감는 기계장치 대신 자동차 클러치장치처럼 플라이휠 마찰원판을 사용해서 레코드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이 시점에서 레코드플레이어와 턴테이블이 서로 다른 장비라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1920년대에 일어난 라디오 붐은 레코드시장에 강한 활기를 불어넣었다. 내장식 앰프와 스피커, 라디오 등 컴비네이션(Combination) 홈시스템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런 것들이 레코드플레이어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턴테이블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단일한 장비가 되었다.



1937




레코드산업과 더불어 레코드플레이어는 극심한 불경기를 맞이했다. 대공황 때문에 판매실적은 바닥을 찍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직접적인 위기였으며 21세기 초의 디지털 비물리적 음악의 효과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1934년, RCA Victor는 최초의 컴포넌트 턴테이블인 Duo Jr.를 팔기 시작했다. 라디오 스피커에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휴지기에 산업의 명맥을 유지시킨 것은 주크박스였다. 그 동안 라디오에서 레코드를 트는 DJ들은 ‘팬케이크 터너(pancake turners)’라고 불렸다.



1947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의 기술혁신이 엄청난 도약을 일궈냈다. 영국 해군이 잠수함 탐지를 목적으로 주파수 대역이 좀 더 넓은 빈도기록법을 발명했으며 16인치 33 RPM ‘V-디스크’는 레코드판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미국 CBS-Columbia의 연구책임자 Peter Goldmark는 좀 더 뛰어난 음질을 내는 33.3 RPM 12인치 마이크로그루브 레코드판의 개발에 매진했다. 그는 이와 더불어 턴테이블에 경량 톤암과 사파이어 니들을 도입했다. 그의 노력의 결과, 셸락 대신 비닐라이트(vinylite, 일명 ‘바이닐’)라는 플라스틱 합성물로 만든 33.3 RPM 12인치 앨범이 1948년에 첫 선을 보였고 경쟁사 RCA Victor 역시 이듬해에 45 RPM 7인치 디스크를 내놓았다.

둘 다 각각 앨범과 싱글앨범의 속도와 크기 표준이 되었지만 78RPM 옵션을 포함해 세 가지 속도의 레코드플레이어가 그 후 2-30년 간 인기를 유지했고 긴 중심축에 포개진 레코드판을 자동으로 교체하는 기계화된 시스템 역시 그러했다. 영국 북부에서는 Bertrand Thorpe, Ron Diggins, Jimmy Savile (그렇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 Jimmy Savile) 같은 모바일 ‘디스크자키’들이 두 대의 턴테이블과 증폭 사운드시스템으로 밴드 없이 음악만 가지고도 대중이 춤을 춘다는 아이디어의 첫 선을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는 유행을 얻게 된다.



1957
가정용으로는 나무 캐비닛에 들어있는 올인원시스템이 인기였지만 마니아들, 혹은 ‘오디오애호가들’은 별도의 턴테이블을 가지고 컴포넌트시스템을 개발했다. 이것이 키트 제작이라는 서브컬처를 만들어내었고 Garrard나 Thorens 턴테이블과 Grado Labs의 포노 카트리지의 활용도가 높았다. 영국에서는 Pye를 통해 스테레오 사운드시스템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바늘이 가로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세로로도 움직이면서 또 다른 음악적 차원을 만들어냈고 좌우 채널에 대안이 되는 신호를 공급했다. 이 시기에 모터기반 고무휠 시스템인 아이들러 드라이브(idler-drive)가 턴테이블을 돌리는 내장식 방식으로 가장 인기 있었지만 이것은 곧 벨트 드라이브(belt-drive) 방식이 더 큰 인기를 끌면서 대체되었다. ‘고충실도’를 뜻하는 ‘하이파이(hi-fi)라는 용어가 등장해서 최고의 음질 재생을 제공하는 장비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 시작했다.



1967
팝시장에서는 장시간레코드의 붐과 더불어 The Beatles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앨범이 히트를 치면서 그런 음악적 마법이 가능한 턴테이블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다. 레코드체인저(record-changer, 음반자동교체장치)가 달린 The Dual 1009이 인기가 있었지만 레코드를 포개놓는 방식이 걸핏하면 바이닐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레코드오디오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점점 비호감이 되었다.




매사추세츠에 있는 한 회사인 Acoustic Research가 ‘싱글 플레이’ 턴테이블로 저렴한 솔루션을 내놓았지만 1965년부터 Matsushita Corporation의 Panasonic이 Technics를 출시했다. Technics는 신흥강자인 하이파이시장을 타깃으로 한 브랜드였고, 1969년에는 벨트 대신 직접구동형 모터를 사용한 최초의 턴테이블인 SP-10을 발표했다. 그러나 뉴욕의 Sanctuary 클럽에서 활동하던 모던 디제잉의 대부 Francis Grasso는 여전히 벨트구동형이며 속도조절 기능이 없는 Thorens 턴테이블을 사용했다.



1977




Technics SL-1100 (1971년)과 SL-1200 (1972년) 턴테이블은 가정용으로 제작되었지만 미국의 디스코씬이 꽃피면서 점점 다방면에서 구매율이 높아졌고 그 후에는 12인치 싱글과 더불어 힙합 커뮤니티에서도 활성화되었다. Technics 덱은 튼튼하고, 강력한 모터를 사용했으며, 타이밍 게이지가 정교했다. Paradise Garage의 프로토하우스 원조 Larry Levan부터 힙합의 Bronx를 고안한 Kool Herc 등의 DJ들은 처음에는 값비싼 고급 Thorens 장비를 쓸 수밖에 없었으나 1979년에 등장한 Technics 1200MK2는 ‘디스코비트를 구사할 수 강인함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정교함’이라는 광고문구를 내세워 클럽랜드를 겨냥했다. 오리지널 1200 시리즈를 업그레이드시켜 탄력흡수와 가동속도를 높이고 피치컨트롤 페이더를 장착했다.

레코드판을 앞뒤로 빠르게 움직일 때 나는 소음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스크래칭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 후로 25년 정도 동안은 수많은 턴테이블이 저마다의 장점을 뽐내며 등장했지만 Technics가 업계 표준이었다. 동시에 일본의 Otomo Yoshihide와 스위스계 미국인인 Christian Marclay 등 미술기반 아방가르드 아티스트들이 턴테이블을 혹사시키는 듯한 실험적인 퍼포먼스로 턴테이블을 뒤집어 연주를 하고 개조를 하는 등 새로운 소음들을 뽑아내었다. 그들의 오랜 영향력으로 20년 뒤에는 턴테이블리즘과 더불어 Mix Master Mike와 DJ Spooky 같은 아티스트들이 떠올랐고, DJ Marky의 그 유명한 거꾸로 믹싱루틴 역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1987
CD가 음악을 듣는 매체로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가정용 턴테이블의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러나 클럽랜드에서는 여전히 바이닐이 건재했다. 1988년에 애시드하우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바이닐과 덱 시장의 열기도 뜨거웠다. Technics가 대세였지만 힙합의 선구자들로부터 배운 클럽과 DJ들 사이에 견고함과 극도의 정교함을 갖춘 최고의 카트리지/니들 콤보를 선택하는 흐름이 생겼다. Stanton, Gemini, Numark, Ortofon 같은 브랜드들의 수요가 급증했다. 80년대 중반에는 DJ들에게 리미티드 리믹스 에디션과 메가믹스, 새 매거진인 을 제공하는 영국 단체 Disco Mix Club이 생겼다. DMC가 매년 주최하는 DMC Mixing Championships은 2년째인 1987년에 턴테이블을 사용하는 DJ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다.



1997
20여 년 간의 실험적인 프로토타입을 거친 후, The ELP LT-1XA 레이저 턴테이블이 등장했다. 두 개의 레이저가 그루브를 읽고 바이닐에 아무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 음악을 재생시키는 방식이었고 음질 역시 인상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행을 타지 못했다. 반면 Pioneer는 직접 바이닐을 조작하는 체험을 모방한 CD 턴테이블로 다양한 실험을 했다. 1990년대 전반에 걸쳐 다양한 제품이 나왔고 1994년의 CDJ-500도 주목할 만 했지만 제대로 소기의 목적을 거둔 제품은 2001년의 CDJ-1000이었다.




그러나 Sasha와 Jeremy Healy 등 시대의 거물급 DJ들은 여전히 바이닐을 사용하고 있었다. Numark, Vestax, Gemini 등의 기업이 경쟁적으로 턴테이블을 내놓았지만 Technics의 시장지배력은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일부 DJ들, 특히 테크노의 대표주자 Carl Cox와 Jeff Mills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두 대의 턴테이블 셋업에 한계를 느끼고 세 대로 늘렸다.



2007




21세기 초기에는 턴테이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하게 줄었다. 디지털 음악파일이 떠오르면서 바이닐시장은 급속도로 감소했다. 그토록 떵떵거리던 Technics 1200 시리즈와 1210 시리즈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2010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CD 덱은 형편이 좀 더 나았다. 예를 들면 2007년의 CDJ-400부터 모든 Pioneer CD 턴테이블에 USB 포트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은 턴테이블의 미래가 요컨대 랩탑과 마우스, MP3와 WAV를 제어하는 MIDI(Music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로 이뤄진 가상체제가 될 것만 같아 보였다. Ableton Live와 Native Instruments의 Traktor 같은 소프트웨어 덕분에 DJ들은 루프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자연히 최고의 싱크를 맞추고 구시대의 DJ들은 꿈도 못 꿨던 수준의 효과를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발전과 함께 새로운 유형의 턴테이블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바이닐을 디지털 형식으로 처리해 음악을 데이터화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제품도 있었다.



2017
가상체제와의 허니문은 한때뿐이었음이 증명되었다. DJ들은 덱의 물리적 특성을 그리워했고 클러버들은 마치 엑셀 스프레드시트에 뭔가를 입력하는 것마냥 랩탑을 만지작거리는 DJ들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밀레니엄 후, Stanton의 Final Scratch 인터페이스가 전통적인 턴테이블 셋업을 통해 디지털 오디오를 바이닐처럼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초기 선두주자였지만 타임코드 컨트롤 레코드를 디지털포맷을 조작하는데 쓸 수 있는 Serato Scratch Live가 선두를 빼앗았다. 그러면서 지금의 Serato DJ 패키지도 나왔다. 그 동안 이제 DJ들과 홈 리스너들 모두를 만족하는 최첨단 턴테이블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휴대용 턴테이블을 사용하는 레코드 쇼퍼들은 스피커가 내장되어 있고 배터리로 가동하는 수트케이스형 GPO Retro Attaché 같은 키트로 바이닐을 가게 안에서 테스트하고, 그러면서 작년에는 Numark가 이 아이디어를 PT01 Scratch에 도입해 조절식 스크래치 스위치와 언제든지 디제잉을 할 수 있는 넌슬립 카트리지 시스템을 장착했다. 이제 수많은 ‘컨트롤러’가 CDJ 턴테이블의 외형에 무한한 스튜디오스타일 이펙트와 다양한 사운드처리의 가능성을 결합했고, 그 동안 바이닐 르네상스는 Reloop RP-8000, Numark TTXUSB, Stanton STR8.150 같은 최첨단 턴테이블을 맞이했다. 음정교정부터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MIDI 버튼 등 광범위한 기술이 녹아 들었다.




Technics 1210 시리즈는 컬렉터들의 필수품이 되어 작년에는 새롭고도 예전 그대로의 모습인 Technics 1200G와 Technics 1210GR 리부트 클래식으로 부활했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의 포일 실린더 ‘턴테이블’로부터 기나 긴 길을 걸어왔지만 1970년대 최초의 모던 클럽 DJ들이 사용한 키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행은 돌고 도는 법이고, 33.3과 45RPM으로도 돌고 도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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